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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사이트/유럽 인문기행

[돌로미티] 미주리나(Lago di Misurina)와 안토르노(Lago d'Antorno) : 두 호수를 걷다

by 된장언니 2026. 4. 8.

미주리나 호수(Lago di Misurina, 1,754m)돌로미티의 3대 호수 중 하나이다. 카레차 호수가 무지개의 전설을 품었다면, 미주리나는 트레치메(Tre Cime di Lavaredo)를 가장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관문이다. 처음 호숫가에 섰을 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5월 말의 돌로미티는 아직 계절의 경계에 있었고, 비가 오락가락하며 산은 구름 속에 얼굴을 숨겼다 내밀었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 흐린 하늘 아래서도 호수는 고요했다. 어떤 풍경은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더 깊다. 

돌로미티, 미주리나(Lago di Misurina)
흐린 5월의 미주리나 호수(Lago di Misurina)

 

라딘족의 전설 :  왕의 눈물이 만든 호수, 미주리나

이 아름다운 호수에는 라딘족의 슬프고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이 계곡에 한 왕이 살았다. 그의 딸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요정을 찾아가 거울을 달라고 간청했다. 요정은 조건을 내걸었다. 왕이 산(Mountain)으로 변해준다면 거울을 주겠다고... 햇볕을 막아줄 나무와 산이 없던 요정의 정원을 위해서였다. 산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 세상 인간으로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왕은 딸을 바라보며 흔쾌히 수락했다.
 
왕의 몸이 점점 커지고, 머리는 나무로, 주름은 크레바스(Crevasse)로 변해갔다. 그런데 딸이 거울을 손에 쥐는 순간, 왕의 손을 놓쳐버렸다. 딸은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왕은 산으로 굳어가면서도 추락하는 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 눈물이 전나무와 풀밭 사이를 세차게 흘러내려, 미주리나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만든 호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혹은 바램을 자연에 투영하려는 습성이 있나 보다. 가는 곳마다 오래된 이야기가 숨어있고 그 이야기 속에는 숭고한 희생과 아름다운 사랑이 녹아 있으니... 

"자연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말씀하시는 첫 번째 책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맑은 날의 그랜드 호텔 미주리나, 오른쪽 사진엔 호수 건너 이스티투토 피오 12세(Istituto Pio XII)도 보인다. (출처 : 그랜드호텔미주리나 홈피)

 

그랜드 미주리나 호텔과 호숫가 카페  :  비 오는 날의 피난처

비가 더 굵어졌다. 호숫가 북쪽, 연노란 외벽에 녹색 덧창이 달린 그랜드 호텔 미주리나(Grand Hotel Misurina)로 발걸음이 향했다. 알파인 스타일의 단정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궂은 날씨를 피해 안으로 들어갔으나,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ㅠㅠ  
 
대신 호숫가의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단체로 식사하러 온 어르신들로 꽉 차서 우리는 구석에 둥지를 틀고, 샌드위치와 음료를 시켜 고픈 배를 채우고 있었다. 호수는 여전히 흐리고 빗방울이 오락가락했으며, 트레치메는 구름 뒤에 완전히 숨어버린 정오였다. 그래도 기대하지 않았던 샌드위치는 맛있었고, 추위를 피해 들어와 앉아 쉴 수 있음이 감사했다. 여행의 소소한 기쁨이다. ~^________^
 
그랜드 미주리나 호텔에서 호수 건너편 남쪽에 보이는 오래된 고성 같은 분위기 있는 노란 건물이 있었다. 사보이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쓰이던 이 건물은 1949년 파르마 교구에 매입되어 이스티투토 피오 12세(Istituto Pio XII)라는 이름의 소아 천식 치료 센터로 운영되었다. 미주리나 호숫가의 맑은 고산 공기는 천식 환자들에게 최고의 치료 환경이었고, 이탈리아 각지의 어린 환자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산 아래 세상과 단절된 채,  맑은 공기와 호수의 고요함 속에서 숨을 고르던 아이들... 그러나 2022년 말, 재정난으로 결국 문을 닫았다. 지금은 주인 없는 건물로 방치되어 있지만, 그 뒤로 보이는 소라피스(Sorapiss) 산군은 그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병풍처럼 지키고 있다. 너무나도 쓸쓸해 보이는 경치였다. 

미주리나(Lago di Misurina), 돌로미티
이스티투토 피오 12세(Istituto Pio XII) 소아 천식센터 (지금은 문닫음)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 호수까지 : 구름이 걷히는 숲길

비가 잦아들었다. 북쪽 숲길을 따라 안토르노 호수(Lago d'Antorno, 1,870m)로 향했다. 미주리나에서 약 1.3km, 고도차 100m가 채 안 되는 완만한 오름길이다. 차도로 가다가 산속으로 난 오솔길로 가보자 했다. 발아래엔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한참 가서야 그 길이 안토르노 호수와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급당황 ㅎㅎㅎ !!!  길이 아닌 곳으로 발이 푹푹 들어가는 잡초더미를 헤치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결국 호수에 닿았다. 
 
안토르노 호수는 아담하고 포근했다.  15분이면 한바퀴 돌아볼 정도의 작은 호수지만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호수를 돌아보는 그 길에는 나무 밑동으로 만든 버섯 모양의 조각들을 심심치않게 만날 수 있었다. 라딘족 장인들이 오래된 나무 밑동을 깎아 만든 것들이 아닐까... 숲의 정령처럼, 이 땅의 오래된 기억이 나뭇결 속에 새겨진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주변에는 이런 나무 조가가들이 자주 보인다.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산장 (식사와 숙박 가능)

 
그리고 구름이 걷히면서, 수면 위로 트레치메 세 봉우리가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이곳에 오길 정말 잘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미주리나 호수가 아니라 안토르노 호수였다.  우리는 이곳에 꽤 머물며 사진도 찍고, 자연도 만끽하며, 구름 사이로 간혹 비추는 햇살에 감사하기도 했다.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안토르노 호수

 

"자연은 신이 쓴 언어다.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파울로 코엘료)

 
세체다에서 내가 '작아짐'을 배웠다면, 이곳에서는 '비워짐'을 배웠다.
말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지고, 내가 사라지는 순간, 그 찰나가 있었다.
 

AI가 그린 미주리나 호수 주변 지도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트레치메가 보이는 안토리노 호숫가
안토르노(Lago d'Antorno), 돌로미티, 트레치메
미주리나 호수에서 아우론조 산장을 지나 트레치메로 가는 길

트레치메를 향하여!!!

안토르노 호수에서 그 유명한 유명한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를 가까이 보기 위해 다시 길을 걸었다. 안토리노 호수에서 트레치메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코스라 인단 아루렌조 산장 근처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성수기 때에는 안토르노 호수 바로 위의 유료 도로를 따라 차로 20분쯤 올라서 아우론조 산장(Rifugio Auronzo, 2,333m) 주차장까지 간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트레치메를 한 바퀴 도는 순환 하이킹 코스를 돌아오면 약 10km, 3~4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5월에 방문한 우리는 호수부터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6월부터 10월 사이에 방문한다면 꼭 리푸조 아우론조까지 차를 몰고 올라가서 순환 하이킹 코스를 즐기시길 권한다. (아우렌조 산장 주차장은 사전 온라인 예약이 필수이다.) 나는 6월 말쯤 다시 가서 도전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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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메를 향하여
아우론조 산장(Rifugio Auronzo)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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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메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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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치메 가는 길의 이정표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 (출처: 월간 산)

 

알고 가면 더 깊은 이야기 :  백색 전쟁 (Guerra Bianca)

트레치메는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묵직한 역사를 품고 있다.

1915년 5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이 고요한 돌로미티에 전쟁이 들이닥쳤다. 이탈리아군트레치메를 요새 삼아 기관총과 포대를 설치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오스트리아군은 불과 수백 미터 맞은편 능선에 참호와 터널을 파며 맞섰다. 해발 2,000~3,000m의 고산지대에서 벌어진 이 전쟁은 '백색 전쟁(Guerra Bianca, White War)'이라 불린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알프스에서 싸웠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총알만큼 무서운 것은 자연이었다. 1916~17년 겨울, 단 48시간 만에 눈사태로 양군 합쳐 약 1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적군보다 산이 먼저 사람을 삼켰다.

전쟁은 1917년 이탈리아군이 돌로미티 전선에서 철수하면서 끝났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지금도 트레치메 하이킹 코스 곳곳에는 당시의 참호와 터널, 암벽에 박힌 쇠사다리 흔적이 남아 있다. 트레킹 하며 걷는 길이, 한때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오가던 그 길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