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 산타루치아 (Colle Santa Lucia) :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코르티나 담페초를 출발해서 Passo Giau로 가는 길목에서 비가 부슬부슬 계속 오고 있었다. 계곡 사이의 절벽 길을 아슬아슬하게 운전을 하다 커피 한잔이 그리워 들렸던, 동화 같은 마을이 콜레 산타루치아(Colle Santa Lucia)이다. 이 마을의 이름에서 'Colle(콜레)'는 '언덕(hill)'이라는 뜻이고, 산타루치아(Santa Lucia)는 루치아 성녀를 뜻한다. 즉, 이 마을 이름은 '산타루치아(성 루치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발 피오렌티나(Val Fiorentina)와 발 코르데볼레(Val Cordevole) 두 계곡 사이의 가파른 바위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해발 1,443m의 높은 곳에 300300여 명이 산다고 한다. 옛날에는 탄광이 있어서 먹고살고 요즘은... 관광이 주가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이지만 이 마을은 이탈리아보다 문화적으로 오스트리아에 더 가깝고, 오스트리아 국경 지역인 티롤(Tyrol)과 매우 가깝다고 한다. 너무나 아름다운 곳으로 관광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가 갔을때는 비수기였고 날씨도 안좋아서 관광객을 한 사람도못 봤다는...허름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는데 정말 친절했고 주인 할머니가 영어도 잘하셨다.
이 마을은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산, 치베타(Civetta)와 펠모(Pelmo)를 마주하고 있다. (특히 펠모산은 그 생긴 모양 덕에 '신의 안락의자'라는 애칭으로 불린다.세상을 창조하던 신이 돌로미티의 눈부신 풍경을 빚어내고 나서, 너무나 만족한 나머지 이 산에 털썩 주저앉아 휴식을 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바람 따라 비구름들이 강물처럼 흘러 다니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품고 있어서일까? 그 잔향이 오래도록 남는 그런 마을이었다.


산타루치아 성당 (Chiesa di Santa Lucia) : 벼랑 끝에서 마을을 지켜주는 빛
교회의 이름이자 마을의 이름인 '산타루치아(Santa Lucia)'는 초기 가톨릭교회의 가장 유명한 동정 순교자 중 한 명인 성녀 루치아(St. Lucy, 283~304)이다.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다 참혹한 고문을 받고 순교한 인물이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문 중에 두 눈이 뽑히는 형벌을 당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녀에게 더 맑고 아름다운 새 눈을 주었다고 한다. 라틴어로 '빛(Lux)'에서 유래한 이름처럼, 성녀 루치아는 어둠을 밝히는 빛의 상징으로 널리 추앙받게 되었다.
이 돌로미티의 소박한 산악 마을이 루치아 성녀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되었을까? 그건 마을 바로 옆에 있던 '푸르실 광산(Miniere del Fursil)' 때문이다. 수백 년 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지하 갱도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자신들의 눈을 보호해 주고,, 무사히 빛이 있는 지상으로 이끌어주기를 '빛의 성녀' 루치아에게 기도했다. 그렇게 광부들의 기도가 모인 언덕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마을 전체가 성녀의 이름을 딴 '콜레 산타루치아'가 되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18세기에 프란츠 운터베르거(Franz Unterberger)가 그린 귀중한 제단화 (성녀 루치아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Palm)와 함께, 자신의 뽑힌 두 눈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는 모습)가 있다. 성당 외부는 폭설에 대비해 눈이 잘 미끄러지도록 가파른 지붕을 얹었고,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영향을 받은 양파 모양의 돔 종탑이 알프스의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성당 외벽에는 1606년에 그려진, 벨루노 지역(Province of Belluno)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가 400년이 넘도록 산마을의 시간을 조용히 알리고 있다.



특히 교회를 둘러싼 작은 묘지는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데, 티롤지방 특유의 섬세한 철제 십자가(Wrought-iron crosses)들이 가득하다. 이 철제 십자가는 마을 바로 옆 푸르실 광산(Miniere del Fursil)에서 난 철로 만들었다고 한다. 광부일로 먹고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고단함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뒤돌아 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아날렘마(Analemma) 효과
위 사진 중에 해시계가 있는 사진을 자세히 보면 8자 모양의 패턴이 보인다. 일 년 내내 매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태양의 위치를 기록했을 때 하늘에 그려지는 8자 모양의 패턴을 아날렘마(Analemma)라고 한다. 이 패턴은 (1) 23.5도 기울어진 지구 자전축과 (2) 지구 공전 궤도의 타원형(Orbital Eccentricity) 때문에 생긴다.
푸르실 광산(Miniere del Fursil) : 풍경은 찬란했으나, 삶은 가볍지 않았다.
콜레 산타루치아 (Colle Santa Lucia)의 삶의 터전이었던 푸르실 광산, 이곳은 단순한 채굴장을 넘어 과거 돌로미티 지역의 경제와 권력 다툼의 한복판이었다. 콜레 산타루치아 마을에서 1.5km 떨어진 몬테 포레(Monte Pore)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푸르실 광산은 철 성분 외에도 망간이 풍부하게 함유된 능철석(Siderite)을 주로 캐던 곳이었다. 이 망간 성분 덕분에 이곳에서 생산된 철은 매우 견고하면서도 유연해 최고급 칼과 무기를 만드는 데 쓰였다. 스페인과 영국의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곳의 철로 만든 명검이 발견될 정도로 전 유럽에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최고급 철이 지닌 막대한 경제적 가치 때문에, 푸르실 광산은 수백 년 동안 티롤 지방(오스트리아 제국 측)과 베네치아 공화국(Serenissima) 사이의 치열한 영토 분쟁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지하 1km 깊이까지 갱도를 팔 정도로 엄청난 전성기를 누렸고, 광산에서 캐낸 무거운 광물은 해발 고도가 높은 산길을 따라 제련소와 안드라츠 성(Castle of Andraz)으로 쉴 새 없이 운반되었다. (이렇게 큰 산업이 600년이나 지속되었는데 콜레 산타 루치아 사람들은 늘 가난했다니... )
채굴된 광석은 저장되고, 계산되고, 운반되고, 거래되어야 했다. 그러니 광산은 몇몇 광부의 일터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중심이었다. 누군가는 산속으로 들어가 철을 캤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관했으며, 누군가는 장부를 정리하고, 또 누군가는 철이 지나갈 길을 지켰다. 광산이라는 것이 단순한 생산 현장이 아니라 한 공동체 전체를 움직이는 질서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현재 푸르실 광산은 주요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일부 갱도(바우츠 갱도, Miniera dei Vauz 등)는 안전하게 복원되어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고, 안드라츠성까지 그 옛날 철을 나르던 수송로는 돌로미티의 멋진 트레킹 코스 '철의 길(Strada delle Vena)'로 변신하여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콜레 산타루치아는 라딘의 진주라고도 불리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라딘족 마을이다.
역사적으로 콜레 산타 루치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수백 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롤(Tyrol) 백작령에 속했다. 이 때문에 현재 볼차노(사우스 티롤) 지역의 라딘 계곡과 동일한 문화 및 역사적 뿌리를 공유하며, 전후 이탈리아 영토가 되면서 행정적으로 베네토 주에 편입되었으나, 주민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뿌리 깊은 라딘족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탈리아어와 함께 라딘어의 현지 방언(Fodom 방언)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돌로미티를 여행하다 보면 자꾸만 더 유명한 봉우리와 더 극적인 풍경을 찾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떤 장소는 크고 화려해서가 아니라, 조용히 깊게 머물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다. 콜레 산타루치아가 내게는 그런 곳이다. 천 개의 바람이 잠시 머물다 가는 언덕, 그리고 그 바람 아래에서 묵묵히 시간을 살아낸 사람들의 마을. 나는 아마 이곳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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