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체다(Seceda, 2,519m)는 돌로미티의 실루엣을 가장 잘 보여주는 능선 전망대이다. 오르티세이 (Ortisei) 마을에서 케이블카를 2구간 갈아타면 20분 남짓 동안 푸른 나무들이 점점 멀어지고, 더 낮아지다가 바위가 밝아지고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아! ~ 세체다!!!! 해발 2,500m 위의 ‘악마가 사랑한 풍경’이라 불리는 숨이 멎는 듯한 절경을 마주하게 된다. 칼로 산을 쪼갠 듯 날카롭게 솟은 절벽은 모두의 시선을 삼켜버릴 만큼 멋지고 웅장하다.

사진에는 담아지지 않는 그 웅장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진에 담지 못한 바람의 세기, 병풍처럼 둘러싼 산군들이 태양과 구름의 흐름으로 1분마다 그 색이 바뀌는 것, 그리고 정상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느껴지던 그 고요와 엄숙함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겠는가... 세체다는 내가 얼마나 작고 먼지 같은 존재인지 깨닫게 해 준 성소였다.

호텔을 나설 때는 햇살이 따스한 봄날씨였는데 산 정상에는 한겨울 폭설이 내린 뒤의 모습이었다. 밤새 눈이 와서 순백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보통 초여름엔 짙은 녹색 초원이 능선을 덮지만, 우리가 방문한 5월 말은 아직 계절의 경계에 있었다. 눈과 바람, 그리고 햇살이 교차하며 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였다.
"세체다는 잠시 머무는 사람에게는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예고 없이 비와 우박이 쏟아지고, 짙은 안개가 산을 감싸거나, 앞이 안 보이게 웅장한 구름이 몰려와 눈보라를 뿌리고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밤새 내린 눈 덕분인지 저 멀리 다른 산군들도 또렷이 보이는 행운의 날이었다. (산을 오르기 전 호텔에서 꼭 산 위의 날씨를 확인하고 올라오자! 산 아래와 위의 날씨가 너무 다르므로...)

세체다(Seceda)라는 이름은 라틴어 '식쿠스(Siccus)'에서 유래되었는데 '메마른(Dry)' 또는 '불모의'라는 뜻이라고 한다. 세체다 정상 부근의 지형을 보면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고, 반대쪽은 평야(? 여름엔 초원)가 펼쳐져 있다. 그런데 이 초원 지대가 과거에는 가축을 기르기에는 다소 척박하고 물이 부족한 '메마른 목초지'였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라딘어(Ladin)의 흔적
이 지역의 원주민 언어인 라딘어로는 'Secëda'라고 표기한다. 돌로미티 지역은 이탈리아어, 독일어, 그리고 고대 라틴어의 방언 격인 '라딘어'가 공존하는 독특한 문화권이라 산 이름 하나도 다양한 언어로 표기된다.
세체다는 단일 봉우리가 아니라 넓은 능선형 전망대이다. 정상의 십자가 주변을 360도 돌면, 매 각도마다 멋진 다른 산군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오들레(Odle) 산군이다. (산타 막달레나 마을 언덕에서 보이던 병풍처럼 우뚝 솟은 그 산군이다.) 발 가르데나 관광청은 세체다를 '발 기르데나의 가장 높은 전망대'라고 소개하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높음'이 아니라 '열려있음'인 것 같다. 한 방향이 아닌 파노라마 극장에서 돌로미티 전체를 둘러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체다(Seceda)에서 보이는 그 날카롭고, 칼날 같은 암봉들을 '오들레(Odle) 산군'이라고 부른다. 오들레(Odle)는 라딘어로 '바늘(Needles)'이라는 뜻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뾰족한 바위들의 모양을 보고 원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이 바늘 같은 뾰족한 바위 중에서도 가장 크고 뾰족하게 솟아 있는 대표적 봉우리 두 개가 (1) 사스 리그이스(Sass Rigais, 3,025m), (2) 푸르케타(Furchetta, 3,025m) 이다.
돌로미티는 원래 바다였다. 2억 5천만 년 전 열대 산호초가 융기하여 만들어진 산이고, 빙하가 깎고, 바람이 조각하여 만들어진 절경이다. 그 옛날 바다였던 곳의 이름이 '물기 없는 땅' = 세체다라니... 재미있다.

세체다 정상 2,519m 지점에 나무로 조각된 큰 십자고상이 서있다. 자연만으로도 기도가 절로 되는데 슬프고 힘들어 보이는 예수의 모습이 마음을 더 경건하고 무겁게 하였던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자마자 윤동주의 '십자가'라는 시가 생각났다. ^^
알프스 산 정상마다 이런 십자가들이 있는데, 이 십자가들은 중세 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Weather Cross' 즉, 폭풍과 우박 그리고 눈사태를 막아달라는 산사람들의 기도의 표지였다. 19세기 등산 붐이 일면서 각 정상들에 십자가가 더 많이 세워졌고, 20세기 세계대전 이후에는 무사 귀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더 많은 십자가들이 다시 세워졌다.
아직도 세체다 십자가 아래서 잠시 두 손을 모으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여행자들이 있다. 가장 선하고, 절실한 기도일 것이다. 여긴 '세체다' 니까 ...


좋은 풍경 앞에서 한참 동안 머물다 가는 새가 있어.
그 새는 좋은 풍경을 가슴에 넣어두고 살다가 살다가 짝을 만나면,
그 좋은 풍경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일생을 살다 살다 죽어가지. (이병률, 끌림 중에서)

세체다 정상에서 오들레(odle) 산군을 등지고 섰을 때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압도적인 산군은 바로 거대한 석회암 성채처럼 버티고 있는 셀라(Sella) 산군과 사솔룽고(Sassolungo) 산군이다. 뾰족뾰족한 바늘 모양의 오들레 산군과는 달리, 남쪽으로 보이는 사솔룽고 산군은 마치 거대한 요새나 성벽처럼 웅장하고 묵직하게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아래 남서쪽으로는 거대한 푸른 초원인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i)'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빠져 살지만, 여행을 떠나 삶을 관조하게 되면 '내가 비로소 작아지는 즐거움'이 어떤 건지 비로소 깨닫고 느끼기 시작한다.
(법상,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에서)


세체다의 대표적인 하이킹 코스 : Col Raiser ~ Mt. Seceda
총 9.7km, 고도차 484m, 난이도 : 보통(modeerate)
케이블을 타고 일단 콜 라이저(Col Raiser) 산정역(2,100m)에서 내린다. 그리고 여기부터 걷기 시작한다.
4번 길 → 피렌체(레겐스부르거) 산장 → 1번 길 → 이만호수(Lake Iman) → 트로이어 산장 → 세체다 정상부
반대로 세체다 정상부까지 케이블로 이동하고 거기서부터 콜라이저 산정역까지 걸어와 케이블을 타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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