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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서재

[말레이시아] 왕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나라? (아는 만큼 보이는 말레이시아 입헌군주제)

by 된장언니 2026. 3. 16.

 
말레이시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왕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독특한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이다. 말레이시아의 13개 주와 왕실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보려 한다.

13개의  주, 하지만 술탄은 9명 뿐?

말레이시아는 13개의 주(State)와 3개의 연방 직할구(Federal Territory)로 이루어져 있다.

  • 13개 주: 말레이 반도(서말레이시아)에 11개 주(페를리스, 케다, 풀라우 피낭, 페락, 클란탄, 트렝가누, 슬랑고르, 파항, 느그리슴빌란, 말라카, 조호르)가 있고, 보르네오 섬(동말레이시아)에 2개 주(사바, 사라왁)가 있다. 모든 주에 술탕(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중 9개 주는 세습하는 술탄(왕)이 존재하며, 나머지 4개 주(페낭, 말라카, 사바, 사라왁)는 국왕이 임명하는 주지사가 있다.
  • 3개 연방 직할구: 수도인 쿠알라룸푸르, 연방 행정 중심지인 푸트라자야, 그리고 국제 연안 금융 센터인 라부안 섬

말레이시아 행정구역

 

5년마다 교대로 맡게되는 국왕 자리?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양디쁘르뚜안 아공(Yang di-Pertuan Agong)'이라고 불리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름 선출직이자 윤번제(돌아가며 맡는 제도)로 운영된다.

  • 선출 방식 : 세습 군주가 있는 9개 주의 술탄들로 구성된 '통치자 회의'에서 비밀 투표를 통해 선출!
  • 임기 : 임기는 5년이며, 통상적으로 9개 주의 군주들이 미리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교대로 국왕직을 승계한다. 

정해진 순번에 따라 승계한다는 말과 비밀투표로 선출한다는 말이 매우 모순되게 들린다. 그러나 둘다 맞는 말이다. 9개 주의 술탄들 사이에는 1957년 독립 당시부터 합의된 '국왕 승계 순서'가 있다. 단, 순번이 돌아왔다고 해서 자동으로 왕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순번이 돌아온  후보가 국왕직을 수행하는 데 신체적·정신적 문제가 없는지, 자질에 결함이 없는지를 판단하는 찬반 비밀투표를 하는 것이다. 
 

현재 말레이시아 제17대 국왕, 이브라힘 이스칸다르 (Sultan Ibrahim Iskandar) (출처: https://efe.com)

 

현재 말레이시아 제17대 국왕, 이브라힘 이스칸다르 (Sultan Ibrahim Iskandar)

2024년 1월 31일부터 5년의 임기를 시작한 현 국왕 이브라힘 이스칸다르는 남부 조호르(Johor)주의 술탄 출신으로, 역대 어느 국왕보다도 개성이 뚜렷하고 화제성이 높아 인기도 많다. 1958년생으로 어머니가 영국계로 혼혈이다. 

  • 억만장자 비즈니스맨: 그는 부동산, 통신업, 발전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엄청난 부자다.
  • 오토바이를 타는 군주: 최고급 자동차부터 대형 트럭, 오토바이까지 엄청난 수집광이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매년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직접 몰고 관할 주를 누비며 지역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주민들과 같이 식사를 하고 밥값을 내주는 등의 행보로 인기가 많았다. 국왕이 되어 쿠알라룸푸르의 연방 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래 자신이 다스리던 조호르 주의 실질적인 통치 권한(섭정)을 장남인 동쿠 이스마일(Tunku Ismail) 왕세자에게 위임했다. 조호르 주를 도는 연례행사인 이 오토바이 투어 역시 자연스럽게 아들인 왕세자가 이어 받았다고 한다.
  • 강력하고 직설적인 리더십: 정치적 혼란이나 부패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국왕 즉위 전후로 "정부가 잘못된 길로 간다면 직접 경고하겠다", "부패한 자들을 사냥하겠다(hunt for the corrupt)"고 공언할 만큼 단호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 독자적인 사병(Private Army) 보유: 그가 본래 통치하는 조호르 주는 말레이시아 13개 주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역사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는 이 군대의 총사령관이기도 하다.
조호르 왕립 군대(JMF, Johor Military Force)

19세기 후반 당시 조호르 술탄 아부 바카르는 영국에게 외교권을 넘겨주는 대신 조호르를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인정해 주는  영국과의 조약을 맺는데, 그 핵심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조호르 내부의 치안 유지와 방위를 위해 술탄이 자체적인 무장 병력을 보유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조항이었다. 덕분에 조호르는 왕실 군대를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말레이 연방국을 구성하게 될 때, 조호르 주는 말레이 반도에서 가장 부유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조호르의 술탄은 새로운 연방에 합류하는 대가로 '독자적인 군대(JMF)를 계속 유지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조호르의 합류가 필수적이었던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는 이 요구를 수용하여 오늘날까지 유지하게 된 것이다. 

늘날 JMF는 말레이시아 연방 국군과는 완전히 독립된 조직으로, 조호르 주 정부의 자체 예산으로만 운영된다. 현재는 전쟁 등 군사적 목적보다는 술탄과 왕실 가족의 경호, 왕궁 수비, 주 정부의 공식 행사 의장대 역할 등 의례적인 임무를 주로 수행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제17대 국왕, 이브라힘 이스칸다르 (Sultan Ibrahim Iskandar) 국왕과 왕비 (출처: https://apnews.com)

 

13개주 술탄 및 주지사와 국왕 (가운데 검은 제복이 국왕) (출처: https://english.news.cn/home.htm)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무조건 '이슬람교도'이어야 하는 말레이시아 국왕은 국가 원수로서 군 통수권과 이슬람교의 수장 역할을 하지만, 실질적인 정치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이다. 엄청난 부와 권위를 자랑하는 화려한 왕궁에 머물지만, 영국의 제도처럼 실질적인 정치와 행정은 국민이 선출한 총리와 의회가 담당한다. 왕은 국가의 중심을 잡아주는 상징적인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다.

웅장한 왕실의 상징, 이스타나 네가라 (Istana Negara)

현재 국왕이 머무는 이스타나 네가라는 쿠알라룸푸르, 잘란 투안쿠 압둘 할림(Jalan Tuanku Abdul Halim)에 위치해 있으며, 2011년에 새롭게 완공된 신궁입니다. (1957년부터 2011년까지 사용하던 구 왕궁은 현재 '왕실 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있다.)
약 30만 평의 거대한 부지에 세워져 있으며, 총 22개의 화려한 돔이 있다고 하며, 역시 국왕이 머무는 곳이라 온통 금색이다^^

관광 포인트 : 국왕의 공식 거주지이자 국가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 내부 관람은 엄격히 제한된다. 정문 밖에서 황금빛 화려한 철문과 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붉은 제복을 입고 입구를 지키는 기마 근위병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시간대를 잘 맞추면 멋진 근위병 교대식도 구경할 수 있다. 또한 왕궁 지궁 꼭대기에 깃발이 보이면 왕이 왕궁에 머물고 있다는 표시라고 한다.

 

이스타나 네가라 (Istana Negara) 왕궁,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출처: https://efe.com)
이스타나 네가라 (Istana Negara) 왕궁 정문 야경 (출처 : trip.com)

 

총리(Prime Minister)가 실질적 행정부 수장이다.

 
말레이시아는 대통령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대통령은 없다. 대신 행정부의 실질적인 권한은 총리(Prime Minister)가 행사한다. 국민이 참여하는 총선거를 통해 하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이나 정치 연합의 지도자를 국왕이 총리로 임명한다.

말레이시아 의회는 영국식 웨스트민스터 제도를 본뜬 양원제로 구성되어 있다.
☆ 상원 (Dewan Negara - 국가 평의회): 총 70석. 이 중 26명은 13개 주 의회에서 각각 2명씩 선출하고, 나머지 44명은 총리의 조언을 받아 국왕이 국가에 공헌한 각계 주요 인사 중에서 임명한다. 임기는 3년이며 1회 연임이 가능하다.
☆ 하원 (Dewan Rakyat - 국민 평의회): 총 222석. 국민들의 직접 선거(소선거구제)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이다. 정부의 예산안을 심의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실질적인 입법 권한을 가진다. 

 

2026년 현재 말레이시아의 총리 :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 차기 지도자에서 정치범으로 추락한 '비운의 황태자'
1990년대 안와르는 말레이시아의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끌던 마하티르 전 총리의 가장 강력한 후계자이자 부총리였다. 하지만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경제 정책을 두고 마하티르와 심하게 충돌했고, 결국 하루아침에 부총리직에서 쫓겨났다. 게다가 부패와 동성애(말레이시아에서는 불법)라는 혐의로 오랜 기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명백한 '정치적 보복'이었다.

☆ 말레이시아 민주화와 개혁의 상징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옥중에서, 그리고 석방된 후에도 기득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레포르마시(Reformasi, 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수십 년 동안 말레이시아의 분열된 야당 세력을 하나로 결집하는 구심점 역할을 하며 민주화의 상징이 되었다. 2022년 11월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야당 연합이 제1당이 되었고, 한때 자신을 탄압했던 국민전선(BN)과 '통합 정부'를 구성하며, 권력의 2인자에서 쫓겨난 지 무려 24년 만에 칠십 대 중반의 나이로 마침내 제10대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다인종 포용과 반부패의 기수
말레이시아 정치계는 전통적으로 말레이계 중심의 민족주의가 강하지만, 안와르 총리는 '모든 말레이시아인은 평등하다'며 중국계와 인도계 등을 모두 아우르는 다인종 통합 정치를 추구하고 있다. 또한 총리선출 후에는, 뛰어난 언변과 카리스마로 정치권의 부패와 이권 카르텔을 뿌리 뽑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2026년 현재 말레이시아의 총리 :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출처: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