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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서재

중국 탐험가 정화(鄭和) 훑어보기

by 조타 2026. 2. 19.

말레이시아 말라카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정화(鄭和)다.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걸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도 그를 기리는 곳이 종종 보인다. 앞으로의 여행에서, 그리고 말라카 블로그에 자주 등장하는 정화를 알아보는 기회를 만들어 보았다. 톫아보지는 못하고 훑어보는 걸로....

말라카의 존커거리(Jonker Walk)에서도 정화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환관이 된 정화

정화(鄭和, 1371-1434)는 중국 명대(明代)의 탐험가이자 장군이며, 환관이다. 본래 이름은 마삼보(馬三保)로, 운남(雲南) 출신의 이슬람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슬람 신자들은 중국이름을 지을때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인 마(馬)를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선조가 칭기스칸의 중앙아시아 원정 당시 몽골에 귀순하여 쿠빌라이칸때 운남성 개발에 참여하면서, 운남성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고, 원의 세력하에 있던 운남성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원나라 멸망 과정에서 어린 정화는 포로로 잡힌 뒤 거세되어 환관(궁정 내시)이 되었다.

● 정난의 변과 인생 반전

명나라의 건국자 주원장(朱元璋, 명 태조)은 강력한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아들들을 전국 각지에 번왕(藩王)으로 봉해 군권을 나누어 주고 이를 통해 외적을 방어하고, 지방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후부터는 자신이 죽고나서 왕들이 서로 싸우고 다음 황제를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번왕의 권한을 법으로 제한하는 등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고자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채 사망했다.

 

1398년 주원장이 죽고 황위는 아들이 아닌 손자 주윤문(朱允炆, 건문제)에게 계승되었는데, 어린데다 정치적 기반 또한 약했다. 그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삭번정책(削藩政策)'을 실시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삼촌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는 죄목(불충, 방종, 법 위반 등의 협의)을 만들어 번왕의 병권을 박탈하고 영지를 축소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왕인 주체(朱棣, 훗날 영락제)에게는 삭번정책이 먹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의 군사적 힘(정예군 보유, 몽골과의 전투 경험 풍부, 군사적 명망 높음)을 이용해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황제를 위협하는 간신을 제거해 나라를 안정시키겠다(靖難)” 1933년

 

 

이때 환관인 마삼보는 연왕의 군사 작전에 동행하며 북방 전선과 수도 집입 과정에서 중요한 공을 세우고 특히 남경 함락 당시 혼란을 수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402년 남경이 함락되고 건문제 또한 실종(?)되었다.  연왕은 황제의 자리는 비울 수 없다는 명분으로 황위(영락제)에 오른게 된다. 영락제는 마삼보에게 황실 성씨에 준하는 '정(鄭)'씨 성을 하사하면서, 그때부터 '정화'라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씨를 하사받는것은 '너는 더이상 포로 출신의 환관이 아니며' '황제의 사람이고 나의 정치적 동반자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는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어 군사, 외교, 재정에 직접 관여하는 막강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정화의 항해

그는 영락제의 명령으로 대원정을 시작한다. 7차례의 원정(1405–1433)을 이끌며 당시 중국의 기술력과 국력을 바다 건너 세계에 보여주었고, 명나라의 외교적 영향력을 확대함과 동시에 해양 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마지막 7번째 원정은 영락제 사후(死後) 그의 손자 선덕제(宣德帝)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정화는 이미 나이가 많아 무리한 항해가 된 것으로 보이는데,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다.

정화문화박물관 전시사진

 

1) 항해의 주요경로와 방문 지역

 

- 동남아시아: 참파(현 베트남 남부), 시암(태국), 말라카(말레이시아), 자바(인도네시아) 등

- 인도 아대륙: 말라바르 해안의 칼리컷(현 인도), 코친 등지에 도착

- 남아시아 및 중동: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현재 이란),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항구를 거쳐 예멘까지

- 동아프리카: 현재의 케냐,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며 중국과 아프리카 사이 문화·물자 교류

 

 

 

2) 항해의 특징

 

- 정화의 함대는 수십 척에서 수백 척에 달했으며, 보선(寶船, 보물선) 등 거대한 배들이 포함됨

- 각국 군주들과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조공 체제를 강화했으며, 때로는 중국에 순종하지 않는 세력을 제압하기도 함함

- 탐험 중 진귀한 동물들(예: 기린, 사자, 표범, 얼룩말, 코뿔소 등)과 사치품을 가져왔고, 문화적 교류도 확대함

● 정화를 기리고 있는 곳

 

1. 중국 난징(南京), 정해사 (靜海寺, Jinghai Temple)

 

명나라 1416년 영락제 때 정화의 항해를 기념하고, 정화가 외국에서 가져온 이국적인 옥과 기타 귀중한 물품을 봉안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에 지어졌다. '정해'라는 이름은 "평온하고 평화로운 바다"라는 의미를 품고 있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이다. 이곳에서 난징 조약의 조건이 논의되었으며, 태평천국 운동과 제2차 중일 전쟁 중 세 번 파괴되고 재건되었다. 1988년 원래 위치에 재건된 정해사는는 1990년부터 난징 조약 역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후 두 차례의 확장을 거쳐 현재는 정해사 기념관으로, 정하의 항해와 난징 조약과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출처 : By Farm - Own work, CC BY-SA 3.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381851

 

 

2. 중국 쿤밍(昆明), 정화공원(鄭和公園, Zheng He Park)

 

정화의 고향인 중국 쿤밍에 조성된 테마 공원으로 진닝구(晋宁区) 월산(月山)에 자리잡고 있다. 1958년에 설립되어 처음에는 월산공원으로 불렸으나, 1978년 정화를 기리기 위해 정화공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 공원에는 정화의 옛 집(郑和故居), 정화 기념관(郑和纪念馆), 정화 동상(郑和雕像), 삼보탑(三宝楼), 정화 비석 숲(郑和碑林), 정화의 아버지인 마하쯔 무덤(马哈只墓)이 있다.

 

 

3. 말레이시아 말라카, 정화문화박물관(鄭和文化館, Chung Ho Cultural Museum)

 

말라카 시에 위치하고, 2005–2006년 개관하여 그의 생애와 항해를 자세히 전시했다. 선박 모형, 항해 기록, 중국–동남아 교류 자료 등을 볼 수 있다.

 

 

4. 말레이시아 말라카, 뮤지엄 벨리아 말레이시아(Muzium Belia Malaysia)

 

더치광장의 그리스도 교회 옆에 있는 박물관으로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1층으로 연결된 안뜰에서 정화의 동상을 볼 수 있다. 

 

 

5. 말레이시아 말라카, 포산텡 사원(寶山亭, Poh San Teng Temple)

 

1795년, 명나라의 사절파견(1409~1411년)을 기념해서 세운 사원으로 중국인 커뮤니티에 의해 세워졌다. 사찰 안쪽에 깊이 들어가면 정화의 동상이 있다.

 

 

6. 인도네시아 세마랑, 삼보동(Sam Po Kong)

세마랑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중국 사원 복합 시설로, 정화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14세기 중국-자바 건축 양식이 혼합된 붉은색 건물이 특징인데, 다양한 종교와 민족이 교류하는 문화적 상징물로 여겨진다. 명나라의 무슬림 항해가 정화가 자바에 처음 상륙했던 장소에 세우고, 그를 기념하고 있다.

 

● 말레이시아 말라카와 정화

 

정화는 말라카를 전략적 항로 및 교역 거점으로 여러 차례 방문했다. 기록상 7차 항해 중 말라카에 5번 이상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말라카는 중국과 아시아 각국 간의 해상 무역과 외교의 중심지였으며, 정화는 이곳에서 명나라와 지역 군주 사이 문화적·정치적 연결고리를 강화했다. 

● 정화의 무슬림 정체성이 원정에 끼친 영향

그의 원정 대상지인 말라카, 인도 서해안(칼리컷), 알아비아 반도, 페르시아만 및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은 이미 이슬람상인과 무슬림 통치자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 그는 이슬람 예절과 관습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고 현지 무슬림 통치자들과 문화적, 언어적 중개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말라카 술탄국에서는 중국과 이슬람세계를 잇는 문화교류의 중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화는 무슬림이었지만 종교적 배타성을 앞세우지는 않았다. 그는 중국 전통신앙인 해신, 마조 신앙을 적극 후원하고 항해 중에는 마조(馬祖)사당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화의 원정은 이슬람 확산의 원인이 아니라, 이미 진행중이던 이슬람화 과정과 병행되며 영향을 주었다.
정화는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난 무슬림 출신이었지만, 그의 항해는 종교 전파보다는 외교와 교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다만 이슬람 세계와의 문화적 친연성은 그가 인도양 세계에서 신뢰받는 중재자이자 연결자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이븐바투타와 정화 비교

두 탐험가 모두 당시 세계의 다양한 지역・문화를 접하고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븐바투타는 개인적 동기와 학문적 열정으로 여행하며 기록을 남겼고, 정화는 국가적 전략과 외교적 목적으로 대규모 함대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구분  이븐바투타 (Ibn Battuta) 정화 (Zheng He)
출신/신분 모로코 출신 이슬람 학자・여행가 중국 명나라의 환관・ 태감
활동시기 14세기 (1325–1354) 15세기 (1405–1433)
성격 개인 주도 여행(자신의 호기심・학문적 목적) 국가 주도 원정(명나라 외교・무역 목적)
탐험방식 육상과 해상 병행, 장기간 장거리 여행 해상함대 대규모 원정
주요여행지역 아프리카 북부, 중동, 인도, 중국, 중앙아시아 등 동남아시아, 인도양 연안, 중동, 동아프리카 (해상 루트)
대표자료 여행기 Rihla(리흘라) — 생생한 기록 제공 공식 기록 및 외교 자료(선박 규모, 외교 영향력 강조)
여행목적 지식・종교・문화적 탐방 중국의 국제 외교・무역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