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가까이 이어진 서양(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지배에 이어 말레이 반도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태평양 전쟁'과 일본군의 점령이다. 이 시기는 말라카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이면서 동시에 '독립'의 불씨를 당긴 결정적인 시기였다.
말라카를 덮친 자전거 부대 (1941-1942) : 은륜 부대(銀輪部隊, 긴린 부타이)
"설마 정글을 뚫고 오겠어?"
1941년 말, 말레이 반도를 지배하던 영국군은 자신만만했다. 그들은 싱가포르를 ‘동양의 지브롤터’라 부르며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겼고, 말레이 반도의 울창한 밀림은 그 어떤 군대도, 특히 탱크나 트럭 같은 기계화 부대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천연 방어벽이라고 믿었다. 영국군의 대포는 모두 바다 쪽을 향해 있었다. 적은 당연히 바다로 올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일본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이 빽빽한 열대 우림을 가장 빠르게 돌파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황당하게도 ‘자전거’를 선택했습니다.


왜 하필 자전거였을까요?
당시 일본군은 전쟁 물자가 넉넉지 않았다. 트럭은 기름이 필요했고, 탱크는 정글의 진흙탕에 빠지기 일쑤였지만 자전거는 달랐다.
첫째, 길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이 말레이 반도 곳곳에 만들어 놓은 잘 닦인 고무 농장 길은 자전거가 달리기에 최적의 ‘고속도로’가 되어주었다. 둘째, 가볍고 조용했다. 영국군이 퇴각하며 다리를 끊어버리면, 일본군은 자전거를 어깨에 짊어지고 통나무 다리를 건너거나 얕은 강을 건넜다. 셋째, 현지 조달이 가능했다. 타이어가 펑크 나면 현지에서 쉽게 고치거나 훔칠 수 있었다. 이 5만여 명의 자전거 부대는 영국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씩 남하하며 영국군의 방어선이 구축되기도 전에 그들의 뒤통수를 쳤던 것이다.
탱크 소리의 정체
일본군 자전거 중 상당수는 열대 기후를 견디지 못해 타이어가 녹거나 터져버렸다. 하지만 일본군은 멈추지 않고 쇠로 된 림(Rim, 바퀴 프레임)만 남은 자전거를 타고 아스팔트 위를 달렸다. 수천 대의 쇠바퀴가 아스팔트를 긁으며 내는 '그르르, 촹촹' 거리는 굉음은 밀림 속에 울려 퍼졌고, 멀리서 이 소리를 들은 영국군은 이를 거대한 탱크 부대가 몰려오는 소리로 착각하고 겁에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자전거가 탱크 흉내를 낸 셈이다.
주인이 또다시 바뀐 도시, 말라카
파죽지세로 말레이 반도를 휩쓸고 내려온 은륜부대는 1942년 1월 중순, 역사적인 도시 말라카에 당도하게 된다. 수백 년 전 포르투갈의 알부케르크가 함선을 이끌고 정복했던 그 바다와 땅을, 이번에는 흙투성이가 된 일본군이 자전거를 타고 점령했다. 말라카를 지키던 영국군은 이미 싱가포르 쪽으로 퇴각한 상태였기에 말라카는 큰 저항 없이 일본의 손에 떨어졌다.
네덜란드의 붉은 건물(스터이스) 앞에도, 영국의 클럽 앞에도 일장기가 걸렸다. 1400년대 말라카 왕국의 영광, 1511년 포르투갈의 침략, 네덜란드와 영국의 지배를 거쳐, 말라카 사람들은 이제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는 아시아의 또 다른 제국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라카 점령 직후, 일본군은 자전거 페달을 더욱 세게 밟아 남쪽의 최종 목적지인 싱가포르까지 함락시킨다.
공포의 3년 8개월 : 바나나 돈과 고구마
일본은 점령 직후 말라카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 숙청(Sook Ching)의 비극 : 일본군은 특히 중국계 주민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때문인데, 말라카에서도 수많은 중국계 청년들이 헌병대(Kempeitai)에 끌려가 학살당하거나 실종되었다. 앞서 본 '부킷 치나' 언덕에는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 휴지 조각이 된 '바나나 머니' : 일본은 점령지에서 쓸 화폐를 마구 찍어냈다. 지폐에 바나나 나무가 그려져 있어 '바나나 돈(Banana Money)'이라 불렸는데,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하여 나중엔 가방 한 가득 돈을 가져가도 쌀 한 됫박을 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 식량난 : 전쟁 물자로 쌀을 징발해가니 사람들은 굶주렸고, 타피오카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말라카의 노인들은 아직도 이때를 '고구마 먹던 시절'이라며 치를 떤다.
깨어난 의식 : 항일운동
정글의 그림자: 말레이야 항일 인민군 (MPAJA)
일본군이 도시를 점령하자, 영국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챙겨 정글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말레이야 항일 인민군(MPAJA: Malayan Peoples' Anti-Japanese Army)’이다.
이들은 모자에 세 개의 별(Bintang Tiga)을 새기고 다녔다. 이 세 개의 별은 말레이의 주요 민족인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의 단결을 상징했지만 실제 구성원의 90% 이상은 중국계였다.

왜 중국계가 주축이었을까?
일본은 점령 직후 과거 중일전쟁의 원한을 갚고 저항 의지를 꺾겠다며 싱가포르와 말레이 반도 전역에서 중국계 남성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끔찍한 '숙청(Sook Ching) 대학살’을 자행했다. 가족과 이웃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중국계 청년들은 복수심에 불타 정글로 들어가 공산당이 이끄는 항일군에 합류했다.그들은 익숙한 지리를 이용해 일본군 보급로를 습격하고, 통신선을 끊고, 첩자를 처단하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일본군에게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공포, ‘정글의 쥐’라고 불리웠다.
"나는 입을 열지 않겠다": 시빌 티가수
총을 든 군인만 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빌 카티가수(Sybil Kathigasu)라는 이름의 유라시안 간호사는 펜 대신 약병을 들고 싸웠다. 그녀와 남편은 자신들의 병원에서 몰래 항일 게릴라들을 치료하고 의약품을 제공했다. 라디오를 숨겨두고 연합군의 방송(BBC)을 청취해 정보를 전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발각된 그녀는 체포되어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은 그녀의 어린 딸을 천장에 매달고, 그 밑에 불을 피우겠다며 협박까지 했지만, 그녀는 끝내 동료들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그녀는 전쟁 후 영국 조지 6세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그녀의 희생정신은 말레이시아의 ‘유관순 열사’와 같은 이야기로 기억된다.
갑작스러운 해방, 그리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이 항복했다. 믈라카를 점령했던 일본군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영국군이 다시 돌아왔다(BMA, British Military Administration). 하지만 돌아온 영국을 맞이하는 믈라카 사람들의 눈빛은 예전과 달랐다. 결국 이 일본 점령기는 1957년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항일운동의 주축이었던 공산당(MPAJA)은 전쟁이 끝나면 자신들이 주도하는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돌아온 영국은 식민 지배를 계속하려 했고 전쟁 영웅이었던 그들은 다시 정글로 돌아가 영국군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본군이 물러가자마자 시작된 긴 내전, ‘말레이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의 시작이다.
일본 침공의 유적들
일본 점령기(1942~1945)는 3년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처럼 웅장한 성이나 교회를 새로 지을 시간은 없었다. 대신 그들이 남긴 것은 '상처'를 기리는 추모비와,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박물관 속 유물들이다.
1. 피맺힌 충성의 기록 : 말라카 항일 투쟁 기념비 (Melaka Anti-Japanese War Memorial)
'부킷 차이나(Bukit Cina)' 입구, 포산텡 사원 바로 옆에 무심코 지나치기 쉽운 곳에 기념비가 있다. 믈라카에서 일본군의 흔적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일본군은 점령 직후, 중국 본토와 싸우고 있던 일본에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계 남성들을 색출해 무자비하게 학살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믈라카 시민들이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에는 한자로 '충정족식(忠貞足式 - 충성과 곧은 절개는 본받기에 충분하다)'이라고 쓰여 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장제스가 직접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2. 바나나 돈과 사무라이 칼 : 역사 민족학 박물관 (History and Ethnography Museum)
스타다이스(Stadthuys) 건물 내부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곳 2층에 가면 일본 점령기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바나나 노트 (Banana Notes) 실물, 당시 시민들이 강제로 발급받아야 했던 '거주 증명서', 일본군이 사용했던 군표, 그리고 일본군 장교의 군도(사무라이 칼), 자전거 부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3. 공포의 현장 : 성심 수녀원 (Sacred Heart Canossian Convent) - 외관만 관람
반다 힐리르(Banda Hilir) 지역에 있는 학교 건물로 아름다운 식민지 풍 건물이지만, 전쟁 당시에는 일본 헌병대(Kempeitai)가 본부로 사용했던 곳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곳에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 현재도 학교로 사용 중이라 외관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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