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 도심 한복판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에 아래와 같은 큰 벽화가 그려져 있다. 오늘날까지도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충성'과 '정의'라는 깊은 질문을 던지는 비극적인 대서사시인 항 투아(Hang Tuah)와 항 제밧(Hang Jebat)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제 그 이야길 풀어볼까 한다. (삽입된 그림들은 술탄 왕궁 박물관 전시물을 사진으로 찍어 온 것이다)

15세기, 황금기 멜라카의 다섯 형제
옛날 말라카 왕국이 번영하던 시절,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다섯 명의 전설적인 전사가 있었다. 그중 리더는 지혜롭고 무예가 뛰어난 항 투아였고, 그의 곁에는 생사고락을 함께한 가장 절친한 친구 항 제밧이 있었다. 그들은 "피보다 진한 우정"을 맹세한 형제와 다름없었다.

억울한 누명과 어긋난 운명
항 투아는 술탄(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최고의 전사였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시기한 대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반역자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항 투아의 됨됨이를 아까워한 재상(Bendahara)은 왕 몰래 그를 처형하는 대신 깊은 숲속에 숨겨주었고,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항 투아가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복수의 불꽃, 항 제밧의 반란
가장 믿었던 형제이자 영웅인 항 투아가 허무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 제밧은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부패한 권력과 왕의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궁궐을 점령하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외쳤다. "왕이 공정하면 존경받을 것이요, 왕이 폭군이면 거부당할 것이다!"
항 제밧의 무예가 너무나 뛰어났기에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고, 말라카 왕국은 큰 위기에 빠진다.
"충성이냐, 우정이냐" 비극적인 재회
제밧을 막지 못해 후회하던 술탄에게 재상은 사실 항 투아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술탄은 즉시 항 투아를 불러 항 제밧을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다시 돌아온 항 투아 앞에 선 항 제밧은 기뻐하며 말했다.
"형님, 살아있었군요! 나와 함께 이 썩은 세상을 바꿉시다!"
하지만 항 투아의 신념은 달랐다.
"제밧, 왕이 비록 실수를 했을지언정 신하는 끝까지 충성해야 하는 법이다."
결국, 가장 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을 겨누며 7일 밤낮을 싸우게 된다.

항 투아는 왕이 하사한 보검 '커리스 사리(Keris Taming Sari)'로 결국 항 제밧을 찌르고, 항 제밧은 형제의 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항 제밧은 친구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며 묻습니다. "투아, 너에게 충성이란 친구의 목숨보다 무거운 것이었느냐?"

☆ 벽화 속 문구의 의미
벽화 왼쪽에 적힌 글귀는 이 두 사람의 특징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다.
Bijak Laksana Tuah (항 투아처럼 지혜롭게):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절제된 지혜를 상징한다.
Berani Laksana Jebat (항 제밧처럼 용감하게): 불의에 맞서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건 용기를 상징한다.
항 투아(Hang Tuah)와 항 제밧(Hang Jebat) 이름 앞에 붙는 '항(Hang)'은 당시 말라카 왕국에서 귀족이나 용맹한 전사, 또는 궁정의 신하에게 붙여주던 일종의 존칭 혹은 직함이다.
☆ 오늘날의 시선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국가에 충성한 항 투아를 최고의 영웅으로 꼽아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친구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권력에 저항했던 항 제밧을 '진정한 정의의 영웅'으로 재평가하기도 한다.
이 벽화는 단순히 멋진 그림이 아니라, "당신이라면 눈먼 충성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위험한 정의를 택하겠는가?"라는 질문을 오늘 멜라카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인문학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말레이시아] 그들의 이슬람은 뭐가 다를까? (0) | 2026.03.27 |
|---|---|
| [말레이시아] 왕이 돌아가며 통치하는 나라? (아는 만큼 보이는 말레이시아 입헌군주제) (1) | 2026.03.16 |
| 싱가포르 건축 역사의 시작 - 조지 콜먼(George D Colman) (1) | 2026.02.24 |
| 중국 탐험가 정화(鄭和) 훑어보기 (1) | 2026.02.19 |
| [말레이시아 역사 보고서] 말레이시아의 탄생과 싱가포르의 눈물겨운 강제 독립 (0) | 2026.02.16 |
| 페라나칸(Peranakan)의 문화 개요 (0) | 2026.02.13 |
| 말레이시아 대표 음식, 락사(Laksa) 총정리 (0) | 2026.02.13 |
| [말레이시아 역사 보고서] 말라카(5) 태평양 전쟁과 일본 점령기 (1941 ~ 1945) (0) | 2026.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