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냐짱에서의 역사 여행과 해양 생태계를 다룬 원숭이섬, 해양박물관 탐방을 블로그 1, 2부에서 소개했다. 이번 3부에서는 가족과 함께 휴양과 온전한 쉼을 위해 보낸 시간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여행의 진짜 목적은 여기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공항 : 싱가포르 창이공항에서 냐짱 깜라인 공항으로

추석 연휴에 떠난 여행이라 그런지 공항 풍경부터 조금 색달랐다. 우리 부부의 출발지인 싱가포르 창이 공항(Changi Airport)에 둥근 달 옆에서 절구를 찧고 있는 옥토끼 설치물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절구가 아니라 약사발이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보아온 이 풍경이 우리나라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달 토끼는 본래 중국의 항아(嫦娥)신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불로불사의 약을 먹고 달로 도망쳐 여신이 된 항아, 그리고 그 곁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의 이야기. 이 신화가 우리나라로 건너오며 떡을 찧는 모습으로 친숙해졌고, 일본에서는 '찹쌀떡(모찌)'으로 구체화되었다. 시공간을 넘어 이런 설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는 건, 실제로 보름달을 가만히 올려다보면 정말로 토끼가 절구를 찧는 듯한 음영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믿고 자란 탓인지, 나는 지금도 보름달을 보면 습관처럼 토끼의 실루엣을 찾곤 한다.


추석의 정취를 품고 냐짱 깜라인 국제공항(Cam Ranh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저가항공을 이용한 덕분(?)에 활주로에 직접 내렸는데, 오히려 냐짱의 맑고 신선한 공기가 온몸으로 밀려들어 와 여행의 시작을 상쾌하게 열어주었다. 활주로에 비행기가 서너 대밖에 보이지 않아 참 여유로운 동네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입국심사대에 길게 늘어선 줄을 마주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기내 서비스가 없는 비행기라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버틴 시간이었는데, 줄을 빠져나오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미식의 천국이라는 베트남에서 우리가 맛본 첫 식사는 아이러니하게도 버거킹이었다. 일단 주린 배를 채워야 호텔까지 가는 한 시간의 여정을 가뿐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거리 : 냐짱 그대로의 모습

냐짱 도심은 해변과 매우 가깝다. 해변을 따라 길게 뻗은 쩐푸(Tran Phu) 거리를 걷다 보면, 쉴 새 없이 오고 가는 오토바이 행렬과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때문에 처음에는 당황하게 된다. 이곳에서는 자가용이나 오토바이가 보행자를 보고 속도를 줄이는 일이 거의 없다. 처음 길을 건널 때는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현지인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건널 수 있게 된다. 우연히 발견한 신호등은 표시가 너무 소박해서 보행자조차 무시하기 일쑤다.


냐짱 해변에 있는 광장의 이름은 '4월 2일 광장(Quảng trường 2/4)'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군이 남부의 냐짱을 접수한 날을 기념해 지은 이름으로, 도시의 가장 상징적인 중심지다. 그 옆에는 냐짱의 랜드마크인 향타워(Tháp Trầm Hương)가 있다. 베트남 국화인 연꽃과 냐짱 특산물인 침향나무 꽃봉오리를 형상화한 건축물이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해변을 걷다 보면 바다에 몸을 담근 수많은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대부분 러시아 관광객들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 뜨거운 태양을 피해 리조트 수영장에 모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변 공원에는 독특한 형태로 전지한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무심한 듯하고, 한편으로는 나무 고유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전히 무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리를 걷다 보면 성당이나 불교 사원뿐만 아니라, 베트남 고유 종교인 까오다이교(Đạo Cao Đài) 사찰도 마주치게 된다. 장난감처럼 알록달록하게 생긴 이 사찰은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가르침을 융합한 20세기 베트남의 신흥 종교다. 주변의 화려한 호텔과 마사지숍 건물들과 함께 이사찰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충분하다.

시내에서 포나가르 사원(Tháp Bà Po Nagar)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바다로 흘러드는 카이강이 내려다보인다.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수많은 파란색 낚시배들은 베트남 특유의 이국적이고 평화로운 어촌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 강하구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바로 쏨봉교(Cầu Xóm Bóng)다. 우리가 묵었던 아미아나 리조트가 위치한 냐짱 북부 지역과 시내 중심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이다.


냐짱의 보도를 걷는 일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겠지만 꽤 불편하다. 인도 대부분을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점령하고 있어 차도로 걸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을 지날 때도 사람과 오토바이가 복잡하게 얽힌다. 게다가 너무나 익숙한 한글 간판과 미러숍 등 짝퉁 상가, 다양한 길거리 음식들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중국 전통 찻잎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프랜차이즈 차지(CHAGEE)가 이곳에서는 차씨(CHACEE)라는 유사 간판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불편한 보행로에서 마주하는 이 다양하고 황당한 경험들은, 냐짱 여행을 기억하게 만드는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조각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한 번쯤 꼭 거리를 활보해 보길 추천한다.
쇼핑 : 더 웨어하우스, 흐엉 사이공, 그리고 크록스까지

이곳 베트남까지 와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증명하기 위해 쇼핑에 집착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가족여행을 하다 보면 세대별로 소비를 향한 욕망의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 쇼핑의 가장 큰 미덕은 저렴한 물가 덕분에 평소라면 쉽게 열리지 않던 지갑을 기분 좋게 열어둘 수 있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그 즐거움을 공유한 채, 이번에는 딸들의 걸음을 따라 베트남 현지의 빈티지 의류 숍으로 향했다. 요즘 젊은 아이들은 명품의 이름을 흉내 낸 '미러급' 짝퉁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는 태도다. 냐짱 시내의 수많은 가게가 한국어 간판을 걸고 한국인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조금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먼저 찾은 곳은 창고형 빈티지 및 기념품 상점인 '더 웨어하우스(The Ware House)'였다. 한쪽에서는 커피를 내리고, 전체적인 디스플레이는 힙하면서도 색감이 쨍해 젊은 층이 딱 좋아할 만한 공간이었다. 빽빽하게 걸린 수많은 티셔츠 사이에서 남편은 아이들에게 어울릴 만한 옷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첫째 연숭이와 둘째 유린기의 취향을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남편이 셔츠를 꺼내 보일 때마다 아이들은 마음에 쏙 든다며 환하게 웃었고, 그 모습이 예쁜지 남편은 지갑을 주저없이 열었다.


아빠가 사준다고 하니 적당히 마음에 들면 골랐겠거니 생각했는데, 여행 내내 아이들이 그 옷을 즐겨 입는 모습을 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아이들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다정한 아빠라는 것을.

또 다른 행선지는 베트남 로컬 브랜드인 '흐엉 사이공(Huong Saigon)'이었다. 사이공의 향기라는 뜻의 이 곳은 호텔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발길이 닿은 곳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감각적인 디자인 덕분에 나와 큰딸 연숭이 모두 옷을 한 벌씩 건질 수 있었다. 마침 여행 기간에 내 생일이 겹쳐 있었는데, 아이들이 기특하게도 이곳에서 상하의 한 벌을 생일 선물로 사주었다.
처음 방문했던 매장에서는 점원들이 모두 그곳에서 판매하는 상하의 세트를 맞춰 입고 있었다. 연숭이는 그 옷이 마음에 든다며 눈독을 들였고, 나는 "너도 그 옷 사 입고 여기서 같이 출근하면 되겠다"라며 농담을 던졌다. 사실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잠옷 같아 보여 마음에 들지 않은 옷이다. 재미있게도 다음 날 근처에 있는 더 큰 매장을 방문했을 때, 그곳 점원들 역시 색상만 다를 뿐 똑같은 '잠옷 세트'를 입고 있었다. 반복 학습의 효과였을까. 그 모습을 본 연숭이는 결국 마음을 접었다. 다시 봐도 영락없는 잠옷 실루엣이긴 했다.
이 브랜드는 현지 물가에 비하면 가격대가 꽤 높은 편이지만, 디자인이 세련되어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에게 인지도가 높다고 한다. 나 역시 평소 체형에 딱 맞는 바지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곳의 바지는 맞춤옷처럼 몸에 예쁘게 맞아떨어져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내 체형이 동남아시아 여성들과 꼭 맞는 모양이다.


사실 명품도 사치라 여겨 사지 않지만, 짝퉁은 더더욱 살 생각조차 없던 나에게 예상치 못한 위기가 찾아왔다. 무더운 싱가포르에서부터 부지런히 걸어 다닌 탓일까. 멀쩡하던 크록스의 밑창이 덜컥 떨어져 나간 것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침 온갖 크록스가 입구에 매달려 있는 로컬 가게를 발견하고 홀린 듯 들어갔다. 알록달록한 디자인들 사이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가격을 물으니 우리 돈으로 단돈 8천 원이란다. 의심할 여지 없는 짝퉁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진품과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감탄 반, 횡재한 마음 반으로 슬며시 한 켤레를 사서 갈아 신었다. 새 신을 신고 다시 길을 걷다 보니, 과장을 조금 보태 냐짱 시내에는 한 집 걸러 하나꼴로 크록스 매장이 보였다.
그리고 냐짱에서 돌아온 지 2주가 지난 오늘, 나는 그 크록스를 아주 조심스럽게 신고 있다. 나의 첫 짝퉁 크록스는 벌써 밑창이 닳아 없어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나의 크록스 밑창은 지우개임이 틀림없다.
미식 : 안토이, 반미판 그리고 탄스엉


공항에서 먹은 버거킹이나 호텔 조식 뷔페, 그리고 저녁에 그랩(Grab) 배달로 해결한 야식들을 제외하면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제대로 발길을 찾은 식당은 총 다섯 곳이다. 안토이(An Thoi), 반미판(Banh Mi Phan), 솜모이 가든(Xom Moi Garden), JJ 씨푸드(JJ Seafood), 탄스엉(Thanh Suong)이 그 주인공이다. 모두 떠나기 전 큰딸 연숭이가 꼼꼼하게 조사해 둔 유명 맛집들이라 실패 확률이 적었다. 메뉴는 우리가 흔히 아는 쌀국수, 반쎄오, 분짜, 반미 같은 대중적인 베트남 요리부터 나트랑 특유의 신선한 해산물 요리까지 다채로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식당이 기대 이상이었고, 남편이 여행 내내 "다음에 여기 또 오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저렴한 물가에 훌륭한 맛까지 더해졌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워낙 대기가 길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안토이 대신 선택한 솜모이 가든도 훌륭했고, 아이들이 합류하기 전 남편과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JJ 씨푸드 역시 만족스러웠다. 직접 경험해 본 다섯 식당의 솔직한 특징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
| 식당명 | 우리가 먹은 메뉴 | 특징 | 비고 |
| 안토이(An Thoi) | 월남쌈, 반쎄오, 쌀국수, 곱창쌀국수 | 피크타임시 대기시간 발생 반쎄오 정말 맛있음 |
가까운 곳에 2호점이 있지만 우리는 일찍 가서 운좋게 안기다리고 1호점에서 먹음 |
| 반미판(Banh Mi Phan) | 반미 샌드위치 (소고기치즈, 새우, 닭고기) |
아침부터 대기줄이 길음 주문 즉시 구워 바삭함 |
주문해서 호텔에서 먹음 |
| 솜모이(Xom Moi) 가든 | 파인애플샌드위치, 분짜, 맛조개모닝글로리 볶음, 해물볶음면 | 규모가 굉장히 크고 쾌적함 | 한국인 운영, 식사 후 한국분이 맛사지샵 할인권을 주면서 홍보 |
| JJ 씨푸드 | 맛조개모닝글로리, 홍합구이, 소금고둥볶음, 갑오징어구이, 블랙타이거새우구이 | 큰 창고형 식당으로 외부와 뚫려있어 더울 수 있으나 괜찮았음 | 시내 중심에 있어 사람 많음 |
| 탄스엉(Thanh Suong) | 랍스터구이, 맛조개구이, 오징어구이, 꼬막구이 등등 | 가성비가 좋고 시내에서 많이 떨어져 있음 에어컨이 없고 현지인이 많음 |
영어 소통이 어려움 랍스터는 여전히 비쌈 |


한국에서 자주 먹던 쌀국수나 반미 샌드위치의 맛은 잠시 잊는 것이 좋다. 특히 현지에서 맛본 반미 샌드위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영향 때문인지 바게트 특유의 겉은 바삭하고 속은 푹신한 식감이 독보적이었다. 그 속에 채워진 숯불 향 가득한 고기와 새콤달콤한 채소 절임, 그리고 매콤한 베트남 고추의 조화는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는 맛이었다. 고수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아이들이 센스 있게 고수를 추가해 준 덕분에, 특유의 이국적인 향까지 더해져 여행 중 최고의 한 입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해산물 식당은 JJ 씨푸드와 탄스엉 두 곳을 찾았는데 모두 만족스러웠다. 탄스엉은 가성비 좋은 로컬 식당이라는 후기를 보고 그랩을 타 시내 외곽까지 한참을 이동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쾌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1층에서 원하는 해산물을 직접 고르는 시스템은 우리나라의 노량진 수산시장과 꼭 닮아 있었다. 다만 동남아라고 해도 랍스터는 여전히 몸값이 비쌌다. 남편과 아이들이 내려가 신나게 랍스터와 생선들을 골라온 덕분에,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비싼 결제 영수증을 받아 들어야 했다.
재미있게도 이곳은 여행 중 영어가 통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식당이었지만, 영어가 가장 서툰 내가 뜻밖의 소통 왕으로 활약한 곳이기도 하다. 입구 벽면에서 우연히 한국의 SKT T멤버십 할인 포스터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AI 번역기를 켜고 서빙하는 현지 청년에게 이것저것 부지런히 요청한 끝에, 야무지게 멤버십 할인까지 챙겨 받는 소소한 쾌거를 이뤄냈다.

베트남 해산물 요리 중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맛조개 모닝글로리 볶음이다. 현지어로 '옵몽따이 싸오 라우무엉(Ốc Móng Tay Xào Rau Muống)'이라 불리는 이 요리는 익숙한 공심채 볶음에 쫄깃한 맛조개가 더해진 메뉴다. 이 조개가 식감과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신의 한 수(킥)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밥도둑이 따로 없으면서 동시에 맥주를 부르는 최고의 안주다.


여기에 곁들인 베트남 맥주는 또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른다. '사이공 맥주(Bia Saigon)'와 '하노이 맥주(Bia Hanoi)'처럼 베트남을 대표하는 두 거대 도시의 이름을 딴 브랜드들이 시장을 이끌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맥주, 부산 맥주인 셈이다. 마트의 주류 코너에서 마주한 사이공 맥주는 라거(Lager), 엑스포트(Export), 스페셜(Special) 등 도수와 풍미에 따라 라인업도 다채로웠다. 매일 밤 모든 종류의 맛을 보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저마다의 매력이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지 식당에서는 미지근한 맥주 캔과 얼음컵을 함께 준다는 것이다. 얼음이 녹으면서 맥주가 밍밍해지기 십상이다. 맥주 본연의 진한 맛을 느끼려면 호텔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루쯤 제대로 묵혀 마셔야 했다. 결국 우리는 시원하게 칠링된 맥주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이틀 밤이나 그랩으로 저녁을 배달시켜 먹었다. 역시 식당의 미지근한 맥주보다는, 방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힌 맥주 캔을 따는 순간이 최고의 힐링이었다.
호텔 : 르모어와 아미아나
우리 가족은 시내에서 2박, 외곽 리조트에서 2박을 머물며 나트랑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매력을 온전히 즐기기로 했다. 이 완벽한 이원화 계획을 짠 큰딸 연숭이는 시내 중심의 4성급 르모어 호텔(Lemore Hotel)과, 차로 15분 정도 떨어진 아미아나 리조트 나트랑(Amiana Resort Nha Trang)을 각각 예약해 두었다.

아이들보다 반나절 먼저 도착한 남편과 내가 처음 르모어 호텔의 문을 열었을 때는 다소 소박하고 허름한 분위기에 살짝 실망하기도 했다. 특히 투숙객을 믿지 못하는 듯 보증(디파짓)조로 여권을 맡기거나 현금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AI에게 검색해 보니 베트남 호텔들의 오랜 관행이라는 답변을 얻어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틀을 묵으며 연숭이의 선택이 전적으로 옳았음을 실감했다. 이곳은 그야말로 사통팔달의 중심지여서 시내 어디를 가도 호텔이 늘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게다가 조식 뷔페에서 내어주는 커피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고, 루프탑에 위치한 마사지숍은 훌륭한 서비스에 투숙객 할인까지 얹어주었다. 둘째 날 아침에는 조식을 포기하고 반미 샌드위치를 먹으러 나갔으면서도, 그 깊은 커피 맛을 잊지 못해 굳이 호텔 식당에 다시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야 말았다.


이어 마주한 아미아나 리조트는 이번 여행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바다에서의 스노클링과 해변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리조트는 기대 이상으로 근사했다. 마당에 단독 수영장이 딸린 멋진 풀빌라 객실들도 눈에 띄었지만, 거대한 수영장이 무려 세 개나 있는 이곳에서 우리만의 독립된 풀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아쉬울 것이 없었다.



우리가 묵은 빌라는 방 두 개에 각각 널찍한 더블베드와 킹베드가 놓여 있었고, 각 방에 딸린 욕실에는 커다란 욕조가, 거실에는 콘도처럼 음식을 데워 먹을 수 있는 식기구까지 알차게 갖춰져 있었다. 리조트 안에는 자연 해수 풀, 바다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성인용 인피니티 풀, 잔잔한 담수 풀이 조화롭게 펼쳐져 있었고, 투숙객만 이용할 수 있는 호수처럼 잔잔한 프라이빗 비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면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해변으로 나가 스노클링을 즐겼고, 해가 저물어갈 때면 인피니티 풀에서 시원한 칵테일을 곁들이며 수영을 했다. 문득 '내 살면서 이런 호사를 몇 번이나 누려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커다란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이토록 과분한 호강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냐짱이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한 감사가 밀려왔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각자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맞추어 좋은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웠다.
리조트를 거닐다 해변가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준비한다는 표지판을 보았다. 신랑 신부의 이름을 보니 한국인이었다. 바닷가에 화려하게 장식된 꽃들과 낭만적인 연회 세팅을 바라보며 세상에는 참 부유한 사람도 많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점차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 속에서 이런 사치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쓸쓸한 시선이 머물기도 했다. 비록 남부럽게 풍족한 형편은 아닐지라도, 가족들이 다 함께 마음을 모아 이토록 소중한 쉼을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냐짱에서의 마지막 날, 우리 부부는 아이들보다 반나절 먼저 공항으로 떠나야 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하러 간 조식 뷔페에서 뜻밖의 선물을 마주했다. 아이들이 리조트 측에 미리 생일 케이크 서비스를 요청해 두었던 모양이다. 하필 떠나는 날이 내 생일이었는데, 아침 테이블 위로 앙증맞은 조그만 케이크가 배달되었다.

거기에 곁들인 소박한 편지까지 받아 들고 나니, 어느덧 숫자가 늘어가는 생일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행복해졌다. 이 다정한 기억을 품고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아이들은 리조트에서 마지막 수영을 즐기고 체크아웃을 한 뒤 가성비가 훌륭하다는 하이디라오에서 점심을 먹고, 네일숍과 마사지숍을 들렀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야무진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아이들과 다시 헤어지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서글프면서도 헛헛해졌다. 이제 제 몫을 다하는 성인이 되었으니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건만, 마주할 때마다 피어나는 이 아쉬운 마음은 언제쯤 무뎌질지 알 수가 없다.


깜라인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카운터 앞에 섰을 때, 상단에 설치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해피 설날(Happy Seollal)'이라는 문구와 함께 한복을 곱게 입은 남녀 인형이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난 설날에 설치한 것을 아직 철거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가올 새해를 미리 축하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추석 연휴에 시작된 여행이 설 연휴의 인사로 마무리되니, 마치 베트남에서 가장 큰 두 명절을 모두 보내고 떠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베트남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담아두었던 다양한 풍경의 사진들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사진을 넘길 때마다 냐짱의 기억들이 선명하게 되짚어졌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곳에 또 올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가보고 싶은 곳은 너무나 많기에 이 도시와 다시 인연이 닿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한 즐거운 시간들과 냐짱이 우리 가족에게 선물해 준 이 눈부시고 멋진 인연만큼은 마음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간직하려 한다. 이 눈부신 시간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언제나 쉽게 허락되는 순간이 아님을 알기에,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이 기억을 소중히 품고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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