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아홉 시, 물 위의 마을로
5대 성씨 중 유일하게 바다를 마주 보고, 문중 소유의 부두를 따로 가지고 있던 집, 양공시(陽公司). 거기서 큰길 하나를 건너면 웰드 키(Weld Quay, 웰드 부두 도로, 海墘路)이다.


본래 조지타운의 해안선은 오늘날 금융가가 위치한 '비치 스트리트(Beach Street, Lebuh Pantai)'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증기선이 도입되고 말레이 반도의 주석 및 고무 무역량이 급증하면서 비치 스트리트 앞 얕은 갯벌로는 대형 선박의 접안과 화물 처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식민 정부는 더 깊은 수심의 정박지와 화물 야적장을 확보하기 위해 비치 스트리트 동쪽 바다를 메우는 대대적인 간척을 단행했다. 비용은 52만 6천 스트레이츠 달러가 넘었다.(요즘 우리 돈으로 수천억 원대 사업) 그렇게 새로 생긴 해안도로에, 당시 스트레이츠 정착지 총독이던 프레더릭 웰드(Frederic Weld, 재임 1880~1887)의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새로 생긴 땅은 누구의 것이 되었을까. 인접한 기존 토지 소유자에게 거의 무상으로 하사되었다. 비치 스트리트에 이미 건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즉, 유럽 상사들과 화교 거상들은 자기 집 앞바다가 메워지자 그 땅을 거의 거저 받았다. 있는 자들의 독식은 모든 역사에서 반복되는 것 같다.


웰드 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문화유산이 바로 해안 쪽으로 뻗어 나간 수상 가옥 마을인 클랜 제티(Clan Jetties, 성씨 부두)이다. 중국 남부(주로 복건성)에서 건너온 부두 하역 노동자들은 부두에서 가까운 곳에 머물러야 했으나, 육지에는 토지 소유권이나 높은 세금 문제가 있었다. 이들은 웰드 키 도로변 바다 쪽에 나무 말뚝을 박고 판잣집을 지어 바다 위로 마을을 확장해 나갔다. Lim, Chew, Tan, Lee, Yeoh 등 동향·동성(同姓) 일족끼리 모여 각자의 부두(Jetty)를 운영하며 화물 상하차 일감을 독점했다.
바다를 메워 길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 길의 바깥쪽 끝이 곧 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때는 매립지 가장자리, 물속에 나무 기둥을 박고 판자를 이어 붙이면 집이 됐다. 땅을 살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 유일한 자리가 거기였다. 게다가 매년 갱신해야하는 허가증을 받아야한다.
그렇게 성씨별로 하나씩 마을이 생겼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5대 성씨는 도시 안쪽으로 파고들어 화강암을 깔고 사당을 지으며 부를 과시했다. 같은 시기, 같은 항구의 다른 사람들은 도시의 바깥쪽 끝, 물 위로 밀려나 집을 지었다. 육지의 마지막 한 뼘 너머가 그들의 자리였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부자들이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을 바다 쪽으로 밀어내며 자랐다. 새로 생긴 땅의 끝이 새로 온 사람들의 자리였다.

Jetty(제티)는 육지에서 바다나 강, 호수 쪽으로 길게 뻗어나가도록 만든 돌출형 목재·석재 부두나 방파제 구조물을 의미한다. 어원은 '던지다(to throw)'라는 뜻의 프랑스어 'jetée'에서 유래했으며, 문자 그대로 바다 쪽으로 내던져진 길 형태를 하고 있다. 본래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해 물건을 싣고 내리거나, 조류와 파도를 막아 항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시설이다.
성씨별로 하는 일도 달랐다.
Ong, Lim, Chew, Lee 쪽은 주로 거룻배(lighter) 일이었다. 항구 바깥에 정박한 큰 배와 부두 사이를 오가며 짐과 사람을 나르는 일. 페낭이 자유항 지위를 잃은 뒤에도, 페낭 앞바다에 선 외국 배의 화물을 작은 배로 옮겨 나르는 일이 오래 이어졌다.
Tan, Yeoh 쪽은 주로 숯과 장작 거래였다. 숯의 원료는 해안선을 따라 자라던 맹그로브였다. 제티와 맹그로브 숲은 한동안 나란히 있었다. Tan Jetty의 안내판은 한 줄 더 적어두었다. 이 마을 조상들은 푸젠 해안의 작은 어촌에서 왔고, 어부와 굴 채취꾼이었다고. 페낭에 처음 왔을 때는 아체 스트리트의 '공사(公司) 집'에 여럿이 모여 살다가, 삼판을 매어둘 자리를 만들려고 바닷가에 기둥을 박기 시작했다고.
집을 지으려고 기둥을 박은 것이 아니다. 배를 매어두려고 박은 기둥 위에 집이 생긴 것이다.

제티(Jetty)에 도착한 것은 아침 아홉시였다. 몰랐는데, 제티에도 문 여는 시간이 있다. 입구 안내판에 방문 시간이 적혀 있다. 오전 아홉시부터 밤 아홉시까지. 사람이 실제로 사는 마을이니 당연한 일인데, 그 안내판을 읽고 나서야 내가 지금 관광지가 아니라 남의 동네에 들어가는 중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이른 시간이라 모든 곳이 조용하고 한적했다. 관광객이 몰리기 전의 제티는 그냥 일상을 사는 마을의 느낌이었다.
** 글을 쓰면서 제티(Jetty)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혼동이 왔다.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부두'이지만 그곳에서 수상가옥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사는 걸 생각하면 '수상가옥촌'이라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내가 본 제티는 수상가옥 마을이면서 부두이기도 했다. 편의상 번역을 '부두'로 하겠지만 단순 부두가 아닌 하나의 마을임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날 내가 걸은 순서는 이랬다. (Lim Jetty와 Ong Jetty는 들어가지 못했다.)
Chew Jetty(姓周橋, 주씨) → Tan Jetty(姓陳橋, 진씨) → Lee Jetty(姓李橋, 이씨) → New Jetty(十姓橋, 열개 성씨) → Yeoh Jetty(姓楊橋, 양씨)

1. Chew Jetty (姓周橋, 주씨 부두)
우선 가장 크고 가장 유명한 곳부터 갔다.
Chew Jetty는 19세기 중반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 일흔다섯 채가 있다. 판자길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긴 쪽이 182미터, 짧은 쪽이 122미터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발을 딛는 순간 알게 된다. 판자가 삐걱거리고, 약간 흔들린다. 널빤지 사이 틈으로는 아래쪽 물이 보이고, 걸을 때마다 미세하게 출렁인다. 여기가 물 위의 마을이라는 사실을 매 걸음마다 인지하게끔. 게다가 그 역한 냄새! 비릿한 바다 냄새에 쓰레기 냄새, 무언가 썩는 냄새가 섞여서 숨쉬기 힘들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Chew Jetty가 특히 심했다.



관광지답게 양쪽으로 기념품 가게와 간식 가게가 줄지어 있다. 젤라또 냉장고, 아이스크림 광고, 첸돌 메뉴판. 아홉 시라 아직 손님은 없고 주인들이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판자에 물이 흥건했다. 이곳에는 붉은 우체통이 걸려 있다. 번호와 함께 'CHEW JETTY WELD QUAY'라고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기념품 가게 사이에 걸린 우체통 하나가, 여기가 여전히 주소가 있는 집들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준다.



중간에 넓게 바다로 뚫린 공간이 나오는데, 검게 그을린 나무집 한 채가 서 있고 그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해먹에 누운 남자, 대야 옆에 앉은 아이, 물로 뛰어드는 아이, 지붕 위의 고양이. 'Folklore by the sea'라는 글씨가 작게 적혀 있다. 여기에 살던 혹은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저 집 앞 툇마루에는 등나무 안락의자 두 개가 바다 쪽을 보고 놓여 있었다.




2. Tan Jetty (姓陳橋, 진씨 부두)
Chew Jetty를 나와 남쪽으로 조금 걸으면 Tan Jetty가 나온다.
안내판에 1917년, 주택 12채라고 적혀 있다. 일흔다섯 채짜리 마을에서 열두 채짜리 마을로 넘어온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관광이 아니라 '방문'이다. 입구에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가지 말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었다.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 세 줄. 글씨는 녹슬어 번져 있는데 뜻은 분명하다. 이 길은 걸어서만 들어오는 길이다. 안내판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2차 대전 때 이 마을 주민 일부는 버터워스의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강제 동원됐고, 자경단을 조직하도록 강요받기도 했다고.





그런데 이 작은 마을이, 제티들 중 가장 긴 판자길을 가지고 있다.
집들은 열두 채니까 몇 걸음이면 지나간다. 그런데 집이 끝나고 나서도 판자가 한참을 더 이어졌다. 양옆에 아무것도 없이, 폭 일 미터 남짓 되는 판자길이 방파제처럼 바다를 가르며 뻗어 있다. 난간도 없다. 그냥 판자와 그 아래 기둥뿐이다. 살짝 겁이 났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방이 물 뿐인 지점이 온다. 발밑에서 판자가 삐걱거리고, 멀리 앞에는 화물선이 연무(?) 속에 실루엣으로 떠 있다.
이 길이 왜 이렇게 긴지는 안내판의 한 문장으로 설명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배를 매어두려고 기둥을 박기 시작했다. 큰 배는 얕은 곳에 댈 수 없다. 그러니 배가 닿는 깊이까지 멀리 판자를 내보내야 했던 것이다. 겁 많은 내 동생은 무서워서 오지 못하고 멀리서 사진만 열심히 찍고 있었다.^^
2/3 지점에는 붉은 창고 한 채가 물 위에 홀로 서 있다. 노란 깃발 하나가 그 옆에 꽂혀 있고. 길의 끝, 바다 한가운데에 서보니 기분이 묘했다. 유럽의 어느 성당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숙연함, 그리고 마음이 순간 확 비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이 또 다른 성전이 아닐까... 싶었다.


3. Lee Jetty (姓李橋, 이씨 부두)
Lee Jetty 입구에는 다른 제티에 없는 것이 있다. 중국식 대문, 패루(牌樓)다. 물론 규모는 보잘것없지만.^^ 아치형 문 위에 「兌山李氏鄉誼會」 (두이산 이씨 향의회), 그 아래 붉은 글씨로 「姓李橋」(성이교)라고 적혀있다. 양쪽 기둥에 붉은 「福」자와 홍등 무늬가 그려져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판자길 위로 「福」(복)자 장식 아치가 몇 개 더 이어진다.
여기가 내가 방문한 네 곳 중 가장 깔끔했다. 매일 쓸고 닦는 느낌이다. 판자의 결이 고르고 화분이 줄 맞춰 놓여 있고, 의자가 단아하게 놓여 있었다. 그런데 안내판을 읽고 나면 이 단정함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Lee Jetty의 설립 연도는 1965년이다. 다른 제티가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인데 여기만 1965년인 이유가 적혀 있었다. 원래 Lee Jetty는 지금의 페리 터미널 자리에 있었는데, 1960년대 페리 터미널 공사로 통째로 옮겨야 했다. 그래서 지금 자리에 새 마을을 다시 지은 것이다. (그 단정하고 깨끗함이 이해가 된다.) 안내판의 다음 문장이 짠하다. 초기 이씨 주민들의 삶은 고단했고, 뱃일을 놓고 다른 제티와 경쟁하느라 충돌이 잦았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평화로운 것은 마을 어른들이 규칙을 만들고 화합을 지켜낸 덕분이라고. 한 마을이 통째로 뽑혀 옮겨진 뒤 예순 해에 걸쳐 다시 만들어낸 질서. 내가 아침에 본 그 단정함은 그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4. New Jetty (十姓橋, 10개 성씨 부두)
Lee Jetty와 Yeoh Jetty 사이에 놓치기 쉬운 마을이 하나 있다. New Jetty(十姓橋, 십성교). 잡성교(雜姓橋)라고도 부른다. 안내판에 1960년, 주택 20채, 그리고 원적란에 마을 이름 대신 성씨 열 개가 적혀 있다. 王·林·周·陳·李·楊·郭·黃·盧·杜. 다른 제티가 전부 '우리는 어느 마을 사람'이라고 적어둔 자리에 여기만 '우리는 열 개 성씨'라고 적어두었다. 혈연이 아니라 이웃으로 묶인 첫 마을이다.
1960년대에 주 정부가 제티의 증축을 금지하자, 각 다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협의 끝에 새 제티 하나를 따로 지었다. 토지국 측량도에 맞춰지었기 때문에 배치가 반듯하고, 1960년대식 철제 창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원래 스물두 채였는데 버터워스에서 섬으로 들어오는 대형 송수관을 묻느라 두 채가 헐렸다. 실제로 들어가 보면 이 반듯함이 바로 보인다. 판자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집이 나란히 서 있고, 흰 난간이 줄을 맞추고 있다. 다른 제티의 유기적으로 뻗어나간 모양과는 확실히 다르다.



5. Yeoh Jetty (姓楊橋, 양씨 부두)
마지막으로 Yeoh Jetty로 걸었다. 입구 기둥에 「東霞陽 姓楊橋」 라고 적힌 작은 간판이 걸려 있다. 안내판에는 19세기말, 주택 열다섯 채. 여기서 한 가지가 눈에 띈다. 이 마을의 절반은 이미 물 위가 아니다. 오랜 매립 공사로 Yeoh Jetty의 절반이 지금은 땅 위에 서 있다. 그래서인지 판자길의 폭이 다른 곳보다 넓다.
처음에 나는 제티의 임씨·진씨·양씨가 시내의 임공시·진공시·양공시와 같은 사람들일 거라고 착각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 아니었다.
5대 성씨와 제티의 사람들은 고향이 달랐다. 그런데 한 곳만 예외다. Yeoh Jetty의 안내판에는 원적이 '福建省 霞陽村'(푸젠 성의 샤양촌)이라고 적혀 있다. 시내에서 본 양공시 대문의 금색 두 글자, 그 霞陽(샤양)이다. 양씨들은 시내에 사당과 문중 부두를 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고향 출신이 다 시내로 들어올 수는 없었나 보다.
Tan Jetty와 Yeoh Jetty는 각각 구황야(九皇爺) 축제 때 신을 태운 배를 바다로 보내는 송신(送神)의 자리다. 시내의 절에서 출발한 행렬이 마지막에 닿는 곳이 이 판자길 끝이라는 뜻이다. 평소에는 빨래를 너는 자리가, 일 년에 한 번은 신이 바다로 나가는 문이 된다니...


집집마다 작은 사당이 있다
각 성씨의 수상가옥 마을의 입구에는 당연한 듯 각 성씨의 사당이 있었다. 대백공을 모시거나 오래된 나무의 신을 모시거나, 손오공을 모시는 사당도 있었다. 우리 가족과 마을을 지켜달라는 간절함으로 가장 화려하게 사당을 꾸미고 가꾸어오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다섯 곳을 다 걷고 나서야 눈에 들어온 것이 있다. 현관문을 열어둔 집은, 예외 없이 문 안에 작은 사당이 보였다. 조상의 위패이거나 작은 대백공(大伯公)이거나, 집집마다 모신 대상은 조금씩 달랐다. 그러나 아침부터 제사상처럼 먹을 것을 올려두고,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에게 신과 함께 사는 일은 의례가 아니라 생활인 것 같다. (차마 집안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쉽다)
해안로의 대백공
十姓橋의 판자 끝, 바다를 마주 본 자리에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붉게 칠한 판자벽에 금색으로 「大伯公」. 편액 양옆에 작은 글씨로 「海」와 「墘」, 두 글자가 따로 박혀 있다. 해안(海墘), 곧 웰드 키다.

1844년 5대 성씨가 아르메니안 스트리트의 복덕정신묘를 근거지로 만든 조직, 건덕당(建德堂)의 또 다른 이름이 대백공회(大伯公會)였다. 겉으로는 토지신 대백공을 모시는 신앙 모임이고 실제로는 호키엔 사회의 질서를 쥐고 흔든 비밀결사였던 그 조직 말이다. 같은 신이다.
도시 안쪽에서 대백공은 조직의 간판이었다. 여기서는 그냥 신이다. 상 위에 유리컵 여섯 개가 물을 담고 놓여 있고, 향로 세 개에 탄 향이 빽빽하게 꽂혀 있고, 부러진 향 부스러기가 상 전체에 하얗게 흩어져 있었다. 대백공 옆으로는 작은 관음상과 신상 몇 구가 크기도 재질도 제각각인 채 나란히 앉아 있다. 체계도 격식도 없다. 그저 오래, 자주 모신 흔적이 있다.

손오공을 모시는 절
걷는 중간에 뜻밖의 절을 만났다. Cheng Giam Keong(清岩宮, 청암궁).
입구 위로 붉은 등이 격자로 빽빽하게 걸려 있고, 그 앞에 화강암으로 깎은 원숭이, 손오공이 여의봉을 쥐고 서 있다. 문미에는 「齊天大聖」 (제천대성). 간판 옆으로는 커다란 복숭아 모형이 붙어 있고, 난간 위에 검은 원숭이 캐릭터가 몇 마리 앉아 있었다. 돌사자가 지키는 정통 사당의 문법과, 만화 같은 원숭이 장식이 한 화면에 들어 있다. 아주 인상적이었다.




5대 성씨의 수호신은 왕손대사, 관우와 개장성왕 등, 전부 역사 속 실존 인물이 신이 된 경우이다. 바다를 건너와 결사를 만들고 광산을 사들인 사람들이 고른 신은 장군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설 속 인물이 신이 된다. 제천대성은 『서유기』의 주인공이다. 부두에서 하루치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고른 신이, 하늘의 질서를 한번 뒤엎어보았던 원숭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바다 위의 관음
Yeoh Jetty를 지나 매립지 쪽으로 더 걸어가면, 물 위에 노란 절이 한 채 서 있다. Hean Boo Thean Kuan Yin Temple(玄母殿, 현모전), 기둥을 물속에 박고 그 위에 이층으로 올린 절이다. 노란 벽에 초록 기와, 처마마다 금빛 용. 물에 반사된 노란색이 그날따라 유난히 짙었다. 十姓橋 끝의 그네에 앉으면 정면으로 보이던 그 절이다. 1972년에 처음 기둥 위에 지었고, 2012년에 조수를 견디도록 보강하면서 지금의 이층 규모가 되었다. 주신은 남해관세음보살(南海觀世音菩薩)이다.






2층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유리장 안에 흰 도자기 관음상이 서 있고, 그 옆으로 크고 작은 신상들이 층층이 늘어서 있다. 뒤쪽 벽에는 산수와 학, 용이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 있다. 바다 위에 지은 절에서 남해의 관음을 모신다. 이름과 자리가 잘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다.
마조(媽祖)를 모신 사당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마조(媽祖)를 모신 사당이었다.
여기서는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다. 들어서자마자 큰 개가 사납게 짖어서, 우리는 거의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에 본 것이 있다. 문 위 편액에 금색으로 「媽祖」, 그리고 판자길 양옆에 노란 깃발이 줄지어 꽂혀 있고 거기에 붉은 글씨로 「天上聖母」(천상성모)라고 적혀 있었다. 마조가 청나라 조정에서 받은 책봉 칭호다.

마조는 푸젠 푸톈의 어촌에서 태어난 임묵랑(林默娘), 바다에 나간 배들을 구하다 스물여덟에 죽었고 이후 신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여자분이다. 그러니까 마조의 성은 임(林)씨다. 5대 성씨 사당 중, 진공시는 개장성왕 진원광을 수호신으로 모신다. 진씨 사당이 진씨 인물을 신으로 모신다는 점에 눈이 갔다. 그런데 임공시가 모시는 마조도 마찬가지이다. 임씨 사당이 임씨 인물을 신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의 마조는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조지타운 구도심의 임공시(구룡당), 비치 스트리트의 은행 건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사당이다. 다른 하나는 여기, 실제로 물 위에 사는 사람들의 사당이다. 한쪽은 바다를 건너와 뭍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뱃사람의 신을 놓지 않았고, 한쪽은 아직도 배와 함께 산다.
판자길이 끝나는 곳까지
나는 다섯 곳 모두에서 판자길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갔다.
제티는 구조가 비슷하다. 길가에 마을 사당이 있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판자길이 시작되고, 양옆으로 집이 늘어서고, 집이 끝난 뒤에도 배를 대기 위한 긴 판자길이 바다 쪽으로 한참 더 이어진다. 집이 끝나고 나면 양쪽에 아무것도 없다. 폭 이삼 미터쯤 되는 판자 하나가 바다 한가운데로 뻗어 있고, 그 위를 걷는다. 난간이 없는 구간도 있다. 끝에는 작은 붉은 창고 한 채가 서 있고, 그 너머는 그냥 해협이다.
좁은 판자를 따라 바다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 경건해졌다. '걸어가며 이루어지는 기도' 같았다.
사람이 없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아침 아홉 시, 판자 위에 나 혼자였다. 감사가 절로 나오는 아침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나가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 뒤를 돌아보면 건너편 제티의 집들이 통째로 보인다. 길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바다 쪽 얼굴. 널린 빨래, 툇마루에 놓인 의자, 물속에 박힌 기둥들. 기둥은 한 그루 한 그루 다른 두께로 박혀 있고, 아래쪽은 따개비로 덮여 하얗다.
아쉬웠던 것은 공기였다. 인도네시아 산불 때문으로 짐작되는 연무가 페낭 전체를 덮고 있어서, 맞은편 육지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버터워스의 크레인도 실루엣만 겨우 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또 나쁘지만은 않았다. 수평선이 지워지니 바다와 하늘이 한 덩어리가 되고, 판자길만 또렷하게 남았다.
소유권이 없는 집들
이 집들에는 땅문서가 없다. 영국은 제티 주민들에게 점유의 법적 지위를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1957년 말라야 독립 이후 실제로 주어진 것은 소유권이 아니라 임시점유허가증(TOL, Temporary Occupation Licence)이었다. 매년 갱신해야 하고, 개발로 철거될 경우 보상을 보장받지 못하는 종이 한 장. 이 상태는 지금까지 이어진다. 백 년을 살아온 집인데, 매년 갱신하는 허가증을 받아야 살 수 있다니... 좀 너무하다.
그리고 반복적인 철거 시도가 있었다.
- 1941년 — 일본군 폭격. Yeoh Jetty가 크게 무너졌고 많은 주민이 돌아오지 않았다
- 1960년대 — 페리 터미널 공사로 Lee Jetty가 통째로 이전
- 2006년 — Koay Jetty(姓郭橋)와 Peng Aun Jetty(平安橋)가 고층 아파트 개발에 밀려 철거
게다가 20세기 내내 당국은 여러 차례 제티를 헐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이 철거의 흐름이 멈춘 것은 2008년이다. 조지타운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제티(Jetty, 성씨교)가 핵심 구역(Core Area)에 포함됐다. 땅문서가 지켜주지 못한 마을을, 세계유산 등재가 지켜주게 된 셈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 단계가 더 진행됐다.
New Jetty (十姓橋, 10개 성씨 부두) 입구에 흰 표지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PROJEK MESRA RAKYAT (PMR) : New Jetty와 웰드 키 선착장을 보수하는 공사 안내판이다. 2024년 9월 착공, 같은 해 12월 준공. 내가 판자 끝에서 본 시멘트 믹서와 페인트 통이 그 흔적이었다. 이건 단발성이 아니다. 2024년에 지역구 예산 65만 링깃이 배정되어 Tan·Lee·Yeoh·New 네 곳의 낡은 판자를 갈았고, 그 전해에는 Chew와 Lim이 먼저 손을 봤다. Lee Jetty는 2015년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판자가 부서지니, 이 마을은 계속 고쳐야만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소유권은 여전히 없다. 여전히 매년 갱신하는 허가증으로 살아남고 있다. 하나 더 바뀐 것은 허가증을 받지만 자손에게 집을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소유권 없이, 허가증만으로. 철거를 면한 마을이 관광지로 바뀌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빠져나가고 있고 한다. 좋아진 것인지... 의문이 들긴 하다.

같은 아침, 다른 일상
Yeoh Jetty의 판자 끝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연무 너머로 조지타운의 낮은 지붕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어딘가에 5대 성씨의 화려한 사당들이 있다. 화강암을 깔고 용을 올리고 금박 편액을 건 집들. 여기서 그 집들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 안 된다.
십 분 거리에 두 세계가 있었다. 한쪽은 땅을 사고 돌을 쌓았고, 한쪽은 물 위에 기둥을 박았다. 한쪽은 아편 청부에 280만 달러를 썼고, 한쪽은 그 항구에서 하루치 짐을 옮겼다. 같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침 아홉 시에 걸어보면, 두 세계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게 된다. 임공시 위패 벽 앞에 도착해 있던 과일 상자와, 제티 집집마다 현관 앞에 차려져 있던 아침 제사상.
돌 위에서든 판자 위에서든, 사람들은 아침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판자가 삐걱거렸다. 발밑으로 물이 보였다.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천천히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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