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을 만나다
페낭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천주교 신자들이 페낭으로 성지순례를 간다는 것.
그리고 1839년 조선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 주교와 성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오기 전, 페낭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페낭과 한국 천주교가 이런 식으로 연결된다고?”
휴양지와 미식 여행지로만 알고 있던 페낭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조금 특별한 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조지타운의 오래된 성당과 교구 박물관에서 시작해, College General(신학교 이름)이 오랫동안 자리했던 풀라우 티쿠스를 지나 지금의 신학교가 있는 탄중 붕아까지... 페낭의 천주교 성지순례~!!!
막상 걸어보니 이곳의 ‘성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성지와 조금 달랐다.
과거가 따로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도시생활 속에 그대로 섞여 있었다.
그게 페낭 성지순례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점이었다.


쇼핑몰 안에 남은 신학교
처음 찾아간 곳은 거니 파라곤(Gurney Paragon), 페낭에서도 꽤 번듯한 쇼핑몰이다.
브랜드 매장이 줄지어 있고 에어컨 바람은 추울 정도로 세고, 바다 쪽으로 난 유리창 너머로 거니 드라이브의 야자수가 보인다.
그런데 쇼핑몰 한쪽 끝에 이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한 노란색의 3층 건물 하나가 붙어 있다.
아치가 반복되는 회랑을 가진 유럽풍의 건물이 쇼핑몰과 멋지게 겹쳐 있었다.
건물 바깥쪽 정문에는 라틴어도 새겨져 있다.
ANNO SANCTO MCMXXV (1925년 희년*)
(*희년은 25년마다 돌아오는 특별한 은총의 해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의 화해를 이루는 특별 기간이다. 보통 이 기간 신자들은 로마나 다른 지정 성지를 순례하고 기도, 자선 등을 통해 전대사의 은총을 구하고, 새로운 영적 출발을 다진다. 1925년은 교황 비오 11세 때 선포된 정기 희년이었다.)



이 건물은 예전에 '성 요셉 수도원(St Joseph's Novitiate)'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지금은 ‘St Jo’s’라는 이름으로 상업·이벤트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갔다. 쇼핑몰 안에 옛 신학교 자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기에, 기껏해야 머릿돌 하나, 오래된 벽 한 조각 정도 남아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새 건물이 통째로 서 있었다. 쇼핑몰 한복판에, 그때 그 규모 그대로.
너무 말끔해서 오히려 의아했다. ‘이거 진짜 옛 신학교 건물 맞아?’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쇼핑몰을 개발하면서 신학교 건물을 그때 그 모습을 재현하여 새로 지어 올렸다고 한다. 어쩐지... 벽도 아치도 창틀도 전부 새것이더라 ~^^ 다행인 것은 이 건물이 페낭 교구 박물관에서 봤던 오래된 사진 속 College General과 똑같이 복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이 도시가 이 장소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고 기억하려한다는 것이다.
1. 아시아를 떠돌던 신학교





페낭의 신학교 이야기는 페낭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7세기 시암, 지금의 태국 아유타야까지 간다. 1665년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MEP)가 아유타야(Ayuthia)에 아시아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를 세웠다.
처음 이름은 '천사들의 신학교(Seminary of the Holy Angels)'였다. 학생들은 시암 사람만이 아니었다. 고아, 마카오, 중국과 베트남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소년들이 모여들었다. 개교 5년 만인 1670년에는 80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이 학교는 훗날 College General, 여러 국적의 신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신학교로 불리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해진다. "왜 굳이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까지 가서 신학교를 다녀야 했을까?"
당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가톨릭 선교가 금지되거나 박해받고 있었다. 자기 나라 안에서 공개적으로 신학생을 교육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신학교를 두고 여러 나라에서 학생들을 보내 공부시키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문제는 그 '안전한 곳'도 계속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 때문에 아유타야를 떠난 신학교는 찬타부리와 혼다트를 거쳐 결국 바다 건너 인도 폰디체리까지 이동한다. 하지만 인도는 중국이나 인도차이나에서 오는 학생들에게 너무 멀었다. 그러다 결국 학교는 한동안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연 곳이 바로 이곳 페낭이다.
왜 페낭이었을까
1808~1809년 무렵 College General은 페낭의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페낭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자유항이었다. 종교 활동도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었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신학생이 모이기 좋은 위치였다. 100년 넘게 이곳저곳을 떠돌던 신학교가 드디어 오래 머물 자리를 찾은 셈이다.
그리고 이 학교의 역사를 들여다 보다 보면 조금 무거운 이름 하나를 만나게 된다.
‘College of Martyrs’ (순교자의 대학)
이곳에서 공부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쳤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훗날 각자의 선교지에서 박해를 받고 순교했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틀어 약 47명의 학생이 신앙 때문에 죽었고, 그중 5명이 성인, 1명이 복자가 되었다.
그 가운데 한국 천주교 신자에게 아주 익숙한 이름이 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샤스탕 신부.
두 사람 모두 조선에 들어가기 전 이 신학교 College General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훗날 1839년에 조선 땅에서 함께 순교한다. 페낭과 한국 천주교의 인연은 바로 여기가 시작이었다.
2. 파쿠하 거리에서 시작한 순례




우리의 본격적인 순례는 조지타운의 파쿠하 거리(Lebuh Farquhar)에서 시작했다.
이 거리에는 몇 분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역사적인 건물들이 여럿 있다. 성모승천성당, 페낭 교구 박물관, 세인트 자비에 학교. 그리고 조금만 더 걸으면 세인트 조지 성공회 교회도 나온다. 한 블록을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페낭 초기 가톨릭 역사와 영국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함께 볼 수 있다.



성모승천성당 (Church of the Assumption)
페낭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성당이다.
이 성당의 시작은 선교사가 아니라 난민이었다. 1786년 프랜시스 라이트가 페낭에 상륙한 그해, 가르노(Garnault) 신부와 가톨릭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케다와 시암 지역에서 페낭으로 건너왔다. 그들이 도착한 시기가 '성모승천대축일(8월 15일)' 무렵이어서 성당 이름도 ‘성모승천’이 되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지금의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다른 장소의 목조 성당에서 시작했고, 현재 파쿠하 거리의 성당은 1861년에 세워졌다. 성당 안내판에 첫 건물의 위치가 꽤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처치 스트리트, 비숍 스트리트, 차이나 스트리트, 피트 스트리트가 만나는 자리의 목조 건물. 가르노 신부가 이 성당의 초대 주임이었다. 그 목조 성당은 1857년, 부쇼(J. B. Boucho) 신부 때 헐렸고, 새 성당은 1860년 파쿠하 거리에서 착공해 1861년에 완공되었다.



내가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성당은 생각보다 존재감이 크고, 고요한 분위기가 나를 압도한다. 나는 잠시 그 고요 속에 서 있다가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렸다.
성당 내부는 온통 밝은 흰색이었다. 유럽의 오래된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많지 않았다. 대신 탁 트인 시원함과 밝음이 있었다. 높은 천장과 커다란 창, 천천히 돌아가는 실링팬. 열대 지방의 성당답게 ‘장식으로 채운 공간’보다는 ‘바람과 빛이 잘 통하는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아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성당 마당에서 우연히 만난 1914년

성당 마당을 걷다가 특이한 비석 하나를 발견했다. 돌로 만든 펼쳐진 책 모양의 위령비였다. 1914년 10월 28일에 벌어진 '페낭 해전(Battle of Penang)'의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비석이다. 이곳이 단지 오래된 신앙의 흔적만 품고 있는 곳은 아니라고 알려준다.
1914년 10월 28일 새벽 조지타운 앞바다에서는 짧고 격렬한 해전이 벌어졌다. 독일 군함 엠덴(SMS Emden)은 가짜 굴뚝을 세워 영국 군함처럼 위장한 채 항구로 들어와 러시아 군함 젬추크를 기습해 침몰시켰다. 항구를 빠져나가던 길에는 프랑스 군함 무스케와 마주쳤고, 이 배 역시 포격을 받고 가라앉았다. 그러나 독일 군함 엠덴은 포격을 멈추고 바다에 빠진 생존자 36명을 구조했다. 그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약 3주 뒤 이 성당에서는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었다.
성당 밖의 지금의 바다는 너무도 고요하다. 한 세기 전 바로 이 앞바다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그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이 이 성당에 모였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래서 이곳은 내게 단순히 오래된 성당이 아니라, 페낭의 신앙과 전쟁의 기억이 함께 겹쳐 있는 장소로 남았다.

비석에는 희생자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그리고 명단 아래쪽에는 프랑스 선원들과 구분해 인도차이나 출신 선원들의 이름도 남아 있었다. 성당 하나를 보러 왔다가 1차 세계대전의 한 장면까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페낭의 역사는 계속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장소마다 '선교와 떠남과 정착, 식민지 역사와 전쟁'이 겹겹이 쌓이는 ...
페낭 교구 박물관 (Penang Diocesan Museum)

성모승천성당 바로 옆에는 '페낭 교구 박물관(Penang Diocesan Museum)'이 있다. 건물 자체는 크지 않다. 그래서 금방 둘러보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있었다. 여러 벽면에 걸쳐 설명문과 옛 사진, 지도와 연대표로 빼곡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진출에서 시작해 선교, 파리외방선교회의 활동, 말레이반도의 가톨릭 선교와 현지인 사제 양성까지. 작은 공간에 다양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계속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College General이다.




그날 관람객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관계자 한 분이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는 굉장히 반가워했고, 이 방 저 방 따라다니며 설명해 주시다가 한국과 관련된 성인 이야기도 먼저 꺼냈다. 페낭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한국에서 순교해 성인이 되었다는 이야길 여러 번 반복해 알려주려 했다. 이곳에서도 이 두 분에 대한 관심과 공경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작은 교구 박물관에서 현지인이 먼저 한국 교회사를 이야기하는 경험이 묘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국 천주교와 이 섬의 인연이 깊구나.’ 점점 페낭이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St. Xavier's Institution (성 하비에르 학교), 200년 된 학교




성당에서 몇 걸음 걸으면 커다란 학교 건물이 나온다.
St. Xavier's Institution. (성 하비에르 학교)
본관 입구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FOUNDED 1852 (1852년 설립)
현재 학교가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설립 연도는 1852년이지만, 학교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까지 올라간다. 초기 가톨릭 선교사들이 시작한 학교가 여러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세인트 하비에르 학교로 이어졌다. 전쟁 때는 건물이 파괴되기도 했고, 전후에는 임시 교실에서 다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도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등교한다.
느낌이 묘하게 좋았다. 역사적인 학교가 ‘옛 학교 터’라는 표지판으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실제 학교라는 것. 수백 년의 시간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너무 멋지지 않은가!!!

성공회, 세인트 조지 교회(St. George's Church)

조금 더 걸으면 순백색의 '세인트 조지 교회(St. George's Church)'가 나온다. 영국 성공회 교회다. 천주교 성지순례 글에 성공회 교회가 왜 등장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건물을 빼면 이 거리의 이야기가 조금 심심해진다.
19세기 초 세워진 이 교회는 영국 식민지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건축에는 당시 인도인 죄수의 노동도 동원됐다고 한다.) 나는 성모승천성당과 세인트 조지 교회를 오가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쪽에는 박해와 어려움을 피해 이 섬으로 건너온 가톨릭 공동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영국 식민지와 함께 들어온 성공회가 있었다니... 묘하지 않나?
서로 전혀 다른 길로 페낭에 들어온 두 교회가 지금은 걸어서 몇 분 거리에 나란히 서 있다.

3. 풀라우 티쿠스, 신학교가 있던 동네
조지타운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풀라우 티쿠스(Pulau Tikus)'라는 동네가 나온다. 지금은 카페와 상점, 오래된 저층 주택과 고층 콘도(아파트)가 섞여 있는 동네다. 그런데 페낭 가톨릭 역사에서는 무척 중요한 장소다. College General이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
이곳의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Church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역시 고향을 떠나온 이들이 새롭게 정착하여 만든 공동체에서 시작됐다. 19세기 초 푸켓 지역에서 건너온 가톨릭 신자들이 풀라우 티쿠스에 정착했고, 초기에는 College General의 경당을 이용해 미사를 봉헌했다. 이후 별도의 경당과 성당이 생기면서 본당 공동체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페낭의 오래된 가톨릭 공동체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딘가에서 떠나온 사람들이 이 섬에 도착해 다시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


이 성당에 도착한 것은 오후 2:30 즈음이었다. 성당은 외벽 페인트칠을 하는 인부들 몇 명뿐 아무도 없었다. 성당 문이 잠겨져 있어서 매우 당황했다. 사무실도 문이 잠겨져 있고... 사무실 앞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도하고 문자도 넣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이 성당에는 샤스탕 성인의 유해를 비롯해 여러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샤스탄 성인은 1830년부터 1833년까지 이곳의 주임신부로 사목 했고, 샤스탕 성인 외에도 여러 성인의 유해를 모신 작은 기도·유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꼭 들어가 보고 싶었다. ㅠㅠ 성당 벽면의 모든 문을 다 열어보려고 성당을 한 바퀴 돌다가 작은 문 하나가 열려있음을 발견하고 몹시 기뻤다. 그 문으로 들어가 보니 성당 내부가 다 보이는 작은 방이 나왔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성당 내부는 잘 보여도 아쉽지만 사진은 빛반사 때문에 안 찍혔다.
유리창 너머에서지만 성인을 기억하고 기도를 했다.


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


이 성당에서 내가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화려한 제대를 볼 수 있는 성당 안의 그 방이 아니었다. 성당 담벼락 옆이었다. 그곳에 성인 샤스탕 신부의 성상이 있고, 바로 옆 벽 아크릴판에 편지글이 쓰여 있었다.
성 샤스탕이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 동료들에게 쓴 마지막 편지
오늘 주교님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자수하여 순교의 길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성찬의 제사를 봉헌한 뒤, 이제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달콤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 그레고리오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길은 결국 승리로 이어지고, 그 길의 끝에는 달콤한 평안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
하느님의 크신 은혜에 우리를 대신해 수없이 감사드려 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고아처럼 남게 될 우리의 가엾은 새 신자들을 부디 잊지 말고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대신하여 이곳에 파견될 사랑하는 동료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가지 소식을 기꺼이 전합니다. 박해를 이끌고 있는 Y(흥선대원군으로 추정)가 사람들의 목을 벨 큰 칼 세 자루를 만들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난 3년 동안 우리가 돌보아 온 이 열심한 새 신자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갈라티아 사람들이 성 바오로 사도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나아가는 잔치는 너무나 크기에 슬픔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도록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들을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에 맡깁니다.
기도와 선행, 고통과 거룩한 희생 안에서 드리는 우리의 겸손한 작별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주교님들과 존경하는 신부님들께 깊은 존경을 표하며,
가장 비천하고 순명하는 종이며 형제인
자크 오노레 샤스탕
조선, 1839년 9월 6일
이 편지를 쓴 뒤 샤스탕 신부 모방신부와 함께 관헌에 자수하였다.
그리고 15일 뒤인 1839년 9월 21일, 두 사람은 앵베르 주교와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이곳 페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던 신부가 조선으로 떠났고, 그리고 몇 년 뒤 죽음을 앞둔 조선 땅에서 마지막 편지를 썼다. 아크릴판은 조금 초라해 보였으나, 성상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작은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꽃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크고 화려한 기념물보다, 지금도 누군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그를 기억하고 꽃 한 송이를 놓는다는 사실이 더 와닿았다.
(샤스탕 신부가 어떻게 페낭에서 조선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한낮의 가톨릭 묘지




같은 동네 켈라와이 로드(Kelawei Road)에는 오래된 가톨릭 묘지가 있다. 처음에 소개했던 거니 파라곤(Gurney Paragon) 쇼핑몰 길 건너에 있다. 페낭 초기 가톨릭 공동체의 신자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알고 갔으나 초기부터 요즘에 돌아가신 분까지 연대가 다양했다.
나는 이곳에 샤스탕 신부와 관련된 비석이 있다는 정보를 보고 찾아갔다. 문제는 시간이 정오였다는 것이다. 페낭에서 묘지를 돌아다니기에는 최악의 시간이다. 그늘도 거의 없었다. 나는 땡볕 아래에서 비석 사이를 한참 돌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못 찾았다.
더위 때문에 놓친 건지, 위치를 잘못 알고 간 건지, 인터넷에 있던 정보가 정확하지 않았던 건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혹시 이 글을 보고 직접 찾아가실 분이라면, 묘지에 들어가기 전에 원죄 없으신 잉태 성당 사무실에서 위치부터 물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그러지 않아서... 덕분에 페낭 한낮의 햇빛이 얼마나 강한지만 아주 제대로 체험했다.^^
4. 드디어 College General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탄중 붕아의 언덕에 있는 현재의 College General이다. 옛 신학교 건물이 없어졌다고 해서 학교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84년 풀라우 티쿠스를 떠나 이곳으로 이전했고, 지금도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는 50여 명의 신학생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공부와 수련을 받고 있다.) 정문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크림색 건물이 잔디 마당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정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COLLEGE GENERAL
REGIONAL MAJOR SEMINARY
건물은 비교적 새것이고 예쁘고 단아했다. 그런데 아치가 줄지어 이어지는 2층 회랑을 바라보고 있으니 박물관에서 봤던 옛 신학교 사진이 떠올랐다. 새 건물인데도 묘하게 옛 모습과 닮아 있었다. 뒤로는 짙은 열대의 숲이 있고, 앞으로는 바다와 고층 아파트가 내려다보인다.


'순교자의 대학’이라는 이름
언덕 아래, 바다가 보이는 쪽에 흰 아치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다. 각각 위에 검은 십자가가 얹혔고, 아치 아래마다 검은 석판이 놓였다. 가운데 석판의 제목이 'MARTYRS OF COLLEGE GENERAL'이다. 하단의 헌정문에 따르면 이 기념물은 2015년 10월 1일, College General 창립 350주년에 봉헌되었다. 1665년부터 헤아린 350년이다. 석판에는 나라별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위쪽은 시성·시복 된 이들이다.
- 베트남 — 앞서 본 신학생 출신 성인 다섯 명
- 한국(KOREA) — 교수 항목에 성 로랑 앵베르와 성 자크 오노레 샤스탕, 둘 다 1839년
- 태국 — 복자 니콜라스 분컷 낏밤룽, 1944년
그 아래로는 동문(ALUMNI)들의 이름이 사제·부제·시종·교리교사·평신도로 나뉘어 빼곡히 새겨져 있다. 미얀마와 캄보디아 항목이 특히 길다. 왼쪽 석판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In loving memory of our Seminary Alumni, Formators, Lecturers and Staff Members.
Faithful servants, forever remembered.
우리 신학교의 동문과 양성자, 교수진, 직원들을 사랑으로 기억합니다.
충실히 섬긴 이들,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합니다."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마태오 25:21
오른쪽 석판에는 지도가 새겨져 있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아시아 여러 곳으로 선교를 위해 흩어져간 곳들을 표시해 놓고 있다.

맨 위쪽으로 두 사람의 성상이 서있다. 1839년 조선에서 순교한 성 로랑 앵베르, 그리고 성 자크 오노레 샤스탕.
페낭의 작은 언덕에서 ‘KOREA’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샤스탕 신부 모두 이곳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조선에서는 신학생들을 이 먼 페낭까지 보내 공부시켰고, 반대로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선교사들은 조선으로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다섯 사람의 금빛 동상
신학교 잔디 언덕 한가운데, 5명의 금빛 조각상들이 서 있다. College General에서 공부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가 사제가 되고, 박해 속에서 순교한 성인들을 기리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 있다. 한 사람은 십자가를 하늘로 치켜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목에 길쭉한 나무칼(枷)을 쓰고 있다. 그 앞으로 세 사람이 터번을 두르고 아오자이 차림으로 앉아 있다. 받침돌의 명판은 이렇게 적고 있다.
COLLEGE GENERAL VIETNAMESE MARTYR-SAINTS CANONISED ON 19-06-1988
성 필립보 민 (1815~1853) · 성 베드로 꾸이 (1823~1859) 성 요한 호안 (1798~1861) · 성 베드로 루 & 성 바오로 록 (1831~1859)
다섯 명 모두 이 학교의 학생이었다가 사제가 되어 베트남에서 순교한 사람들이다. 1988년 6월 19일, 요한 바오로 2세가 베트남 순교자 117위를 시성할 때 함께 성인이 되었다. 목에 칼을 쓴 조각상 앞에 서고 나서야, 박물관 안내판에서 읽은 '순교자의 대학'(College of MARTYRS )이라는 이름이 실감 났다. 이 학교가 아시아 각국으로 돌려보낸 졸업생 중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순교하였다.
2003년 이곳을 답사한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의 기록에 따르면, 본관 위쪽의 작은 신학교 경당 안에 한국 성인들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그리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우리는 이 신학교를 방문하기 위해 미리 이메일을 보내서 방문을 허가받았다. 세분의 유해 일부는 신학교 내의 경당에 모셔져 있는데 , 학기 중이고 주중이라 아쉬지만 경당 내부에 대한 허가까지는 받지 못했다. ㅠㅠ




쇼핑몰과 성당 사이를 걸었다

‘성지순례’라고 하면 왠지 엄숙하고 무거운 풍경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페낭에서 걸었던 길은 조금 달랐다.
쇼핑몰 안의 복원된 건물.
카페와 아파트 사이에 있는 성당.
지금도 학생들이 등교하는 오래된 학교.
땡볕 아래 텅 빈 묘지.
성당 담벼락에 붙어 있던 샤스탕 신부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신학교 언덕 위의 순교자 기념비.
성지가 일상 속에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더 큰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오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조선의 어린 신학생들은 왜 이 먼 페낭까지 온 걸까?
그들은 이곳에서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배웠을까?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려고 한다.
https://booksharp.tistory.com/131
[말레이시아, 페낭] 천주교 성지순례(2) : 페낭을 거쳐간 사람들
https://booksharp.tistory.com/130 [말레이시아, 페낭] 천주교 성지순례 (1)조선에서 순교한 선교사들을 만나다페낭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천주교 신자들이 페낭으로 성지순
booksharp.tistory.com
'여행 인사이트 > 동남아시아 인문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베트남, 냐짱] 4박 5일 가족여행 3탄 - 냐짱에서의 쇼핑, 미식 그리고 호텔 (4) | 2026.10.16 |
|---|---|
| [베트남, 냐짱] 4박 5일 가족여행 2탄 - 원숭이 섬과 해양박물관, 바다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 (1) | 2026.10.08 |
| [베트남, 냐짱] 4박 5일 가족여행 1탄 - 포나가르 사원부터 CCCP 카페까지, 한눈에 보는 베트남 역사 투어 (6) | 2026.10.02 |
| [말레이시아, 페낭] 천주교 성지순례(2) : 페낭을 거쳐간 사람들 (0) | 2026.10.01 |
| [말레이시아, 페낭] 페낭 길 하나 사이, 태국 사원과 미얀마 사원은 왜 이렇게 다를까? (0) | 2026.09.24 |
|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 클랜제티, 물 위에 지은 백 년 마을 (0) | 2026.09.22 |
| [말레이시아, 페낭] 높은 계단 끝에서 만난 힌두교 무르간 신, 폭포 언덕 사원 (3) | 2026.09.21 |
| [말레이시아, 페낭] 언덕 위의 서방정토, 켁록시 사원(極樂寺, 극락사) (2) | 2026.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