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다시 찾은 밴프
캔모어(Canmore)를 떠나 밴프(Banff)로 들어간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거기서 다시 만난 보우강(Bow River)은 조금 달라 보였다. 분명히 같은 강인데 더 짙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건너편에는 런들산(Mount Rundle)이, 마을 쪽으로는 캐스케이드 산(Mount Cascade)이 병풍처럼 둘러있었고 그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보우강이 이렇게 예뻤었구나! 감탄을 연발했다. 16년 전 10월 중순, 가족들과 이곳에 왔었는데... 다시 오게 되어서 너무나도 가슴 벅차고 흥분되었다. 그때의 좋았던 기억이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렀으니까. 가을의 밴프와 여름의 밴프가 어떻게 다른지, 또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지에 대한 궁금한 마음과 그리움을 가득 안고 밴프에 입성했다.


기억이 많이 흐려져서 16년 전 방문했을때 어디에 묵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눈이 살짝 덮인 산들로 빙 둘러싸여 있었고, 예쁜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던 작은 마을의 이미지가 머리와 가슴에 남아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산들도, 하늘도 그대로인데 마을은 좀 더 번잡해졌고,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역시 여름 성수기! 낯설다기보다는 정겨웠다. 오래 못 본 사이 부쩍 자란 조카를 만난 기분이랄까.
밴프는 수많은 예쁜 샾들과 맛집들로 가득찬 매력적이 곳으로 업그레이드 되어있었다. 한국에서 방영되었던 '이 사랑 통역이 되나요?' 덕분인지 한국인 관광객도 많이 보였다.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브랜드 샾들도 많지만 지역 수공예 물품이나 가공식품을 파는 가게들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지역에서 만들었다는 비누와 올리브유를 샀고, 직접 만들었다는 수제 맥주를 테이스팅하면서 밴프를 즐겼다.






그리고 하나 더. 그때는 보우강(Bow River)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 같은 강을 두 번 보았는데 이제야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캔모어 덕분일까? 그사이 강이 변한 게 아닐텐데... 변한 건 나일 것이다. 무엇이 달라진 걸까.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있게 된 것, 그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이렇게 다르게 보이는 걸까?

온천에서 시작된 나라
밴프 애비뉴를 걸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 도시의 시작도 캔모어와 똑같이 철도였다는 것이다. 1883년 가을, 캐나다 태평양 철도 노동자 세 사람(프랭크 매케이브와 톰·윌리엄 매카델 형제)이 설퍼산(Sulphur Mountain) 기슭에서 김이 오르는 구멍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들은 쓰러진 나무를 구멍에 밀어 넣고, 그것을 타고 내려가 유황 냄새가 나는 뜨거운 웅덩이를 찾아냈다. 훗날 윌리엄 매카델은 그 광경을 아라비안나이트의 꿈같았다고 회상했다.
물론 이들이 '최초'는 아니었다. 보우 밸리에는 무려 만 년 전의 거주 흔적이 남아 있다. 원주민들에게 이 온천은 오래전부터 병을 고치고 몸을 돌보는 신성한 물이었다. 세 사람이 한 일은 발견이 아니라 소유권 주장이었던게지... 그들은 온천 입구에 오두막을 짓고 정부에 소유권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뜨거운 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오지 않던 시대에 온천은 곧 돈이었다. 다른 청구인들이 나타나면서 분쟁이 커졌고, 결국 1885년 11월, 연방정부는 이 일대 약 26제곱킬로미터를 '밴프 온천 보호구역'으로 지정해버린다. 그것이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 국립공원의 시작이었다.


겨울에 밴프에 온다면 꼭 설산으로 둘러싸인 온천을 체험해보고 싶지만, 이번 여행은 한 여름이라... 포기했다^^
보호구역 지정의 동기는 솔직히 자연 보전이라기보다 관광 자원의 국유화에 가까웠다. 철도는 승객이 필요했고, 정부는 서쪽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이런 행정조치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들이 빼앗은 원주민들의 이야긴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 씁쓸함으로 남는다.
참고로 '밴프'라는 이름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왔다. CPR 경영진의 고향인 밴프셔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캔모어도 밴프도, 로키의 마을들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붙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시차적응 실패와 오니기리
숙소는 무스(Moose) 호텔 앤 스위트였다. 밴프 애비뉴 한복판인데도 안쪽으로 들어가면 조용한 중정이 있고, 장작이 가지런히 쌓인 처마 아래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로비는 돌 벽난로와 굵은 목재로 이루어진 산장 모습이었다.
시차 적응은 완전히 실패했다. 저녁이 되면 눈이 감겼고, 새벽 한두 시면 말똥말똥 깨어 있었다. 새벽에 깨어 창밖의 어둠을 보고 있으면, 몸은 아직 지구 반대편, 서울에 있는데 나의 영혼만 먼저 도착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객실에는 작은 주방과 거실이 딸려 있어서, 샐러드 재료와 계란, 과일을 사다가 아침을 차려 먹었다.
나와 남편은 다음 날 산행을 대비해 약간의 간식과 물, 그리고 오니기리도 몇 개 사두었다. 셔틀버스를 타기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야하는데 오늘은 좀 잘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가게 계산대 위에 다루마 인형과 오니기리 캐릭터 인형이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고 괜히 반가워서 골랐는데... 맛은 정말 x 정말 별로였다. ㅎㅎㅎ



다리를 건너
저녁 무렵 밴프 애비뉴를 걸어 내려가 보우 리버 브리지(Bow River Bridge)를 건넜다. 여기서 하나 짚어둘 것이 있다. 이 글에 담긴 강가 풍경은 모두 저녁 일곱시 즈음에 본 것들이다. 서머타임이 적용되는 로키의 7월은 밤 열 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진다. 한국의 감각으로는 오후 세 시쯤에 해당하는 빛이 저녁 내내 이어지는 셈이다. 처음에는 이 긴 낮이 선물처럼 느껴졌다. 하루가 두 배로 늘어난 기분이 이라고나 할까... 다리 위에서 상류를 보면 물이 거울처럼 펼쳐지고 그 위에 산이 통째로 얹혀 있었다. 양옆으로 다른 다리들도 보여서 한참 사진을 찍었다.

시간의 흐름 속, Cascade of Time Garden
다리를 건너면 정면으로 웅장한 돌로 만들어진 건물이 나타난다. 그 뒤편에 캐스케이드 오브 타임 가든(Cascade of Time Garden)이 숨어 있다. (줄여서 Cascade Gardend이라고도 한다.) 밴프 애비뉴의 인파에 비하면 놀랄 만큼 조용했다. 많은 관광객이 건물만 보고 멋진 정원이 그 뒤에 있다는 건 모르고 간다고 한다. 뭐든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보이는 법이지...
Cascade : '계단처럼 층층이 떨어지는 물줄기'
밴프 지역을 다니다보면 '케스케이드(Cascade)'라는 명칭을 자주 접하게 된다.
* 어원 : 라틴어 cascare(떨어지다) → 이탈리아어 cascata(폭포) → 프랑스어 cascade → 영어 Cascade
즉, 한 번에 뚝 떨어지는 큰 폭포(waterfall)보다는, 바위를 타고 여러 단으로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에 가까운 뉘앙스이다.
밴프에서 이 말의 출발점은 캐스케이드산 남쪽 사면의 폭포라고 한다.
1858년 팔리서 탐사대의 지질학자 제임스 헥터가 이 봉우리를 캐스케이드 마운틴이라 이름 붙였는데, 스토니 나코다족이 부르던 이름은 Mînî Hrpa, 곧 '물이 떨어지는 산'이라는 뜻이었다. 즉 헥터는 원주민이 이미 부르던 이름을 영어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 전에도 1841년 조지 심프슨은 회색 바위 위로 흐르는 물줄기를 은실 한 오라기 같다고 적었고, 1845년 드 스메 신부는 깎아지른 바위 한가운데서 솟아나 물보라를 일으키며 평원으로 쏟아진다고 묘사했습니다. 사람마다 표현은 달라도 결국 모두 같은 폭포를 본 것이지요.
Cascades of Time Garden은 1935년에 조성되었고, 이 건물은 캐나다 정부가 세운 최초의 국립공원 청사였으며, 정원 자체가 로키산맥의 지질학적 시간을 되새기도록 설계되었다. 물이 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구조로 억겁의 지층 시간을 표현한 것이니, 여기서의 Cascade는 물의 낙차인 동시에 '시간의 층'이라는 중의적 이름인 셈이다.


이 정원의 내력이 흥미롭다. 1930년대, 세계는 대공황 한복판이었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실업자 구제 사업의 하나로 국립공원에 일자리를 만들었고, 그중 하나가 이 정원과 밴프국립공원 행정 건물(Banff National Park Administration Building) 건축이었다. 설계자는 해럴드 베켓(Harold C. Beckett)이고, 이 건물은 1936년 무렵 완공되었다. 외벽은 석회암을 쪼개어 쌓았고, 지붕은 삼나무 널판으로 덮었다. 역사적 연관성과 건축적, 환경적 가치를 인정받아 연방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자리에는 원래 브렛 요양원이 있었다. 온천수를 이용하던 스파 겸 병원이었는데 1933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터에 관리동이 들어선 것이다. 정원 이름이 '시간의 계단(Cascade of Time)'인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안쪽으로 넓은 잔디가 펼쳐져있고 여기저기 예쁜 야생화들이 눈에 띈다. 심어진 꽃들도 아무거나가 아니라 고산의 짧은 여름과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종류만 골라 심었다고 한다. 평화롭게 쉼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정겹다. 정원에서 시내 쪽을 돌아보면 밴프 애비뉴 위로 캐스케이드산이 정면으로 서 있는데 최고의 포토존이다.
'대공황기의 실업 구제 사업이 백 년 뒤 관광객이 쉬어 가는 정원이 되었다는 것'과 '캔모어의 폐광이 산책로가 된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어려운 시절 목숨걸고 일하던 분들의 영혼이 오늘 우리에게 쉬어가라고 배려하는 걸까?


낸시 파우 브리지(Nancy Pauw Bridge)
정원을 나와 낸시 파우 브리지(Nancy Pauw Bridge)를 건너기 위해 보우강을 따라 걷다가 말들의 행렬과 마주했다. 카우보이 아니고 카우걸(Cow Girl)이 말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이 멋지다. 몽골의 말들 보다 훨씬 크고 잘 관리가 된 모습이었는데 국가의 빈부차이가 말들에서 느껴져서 좀 씁쓸했다.
낸시 파우 브리지(Nancy Pauw Bridge)는 보행자와 자전거만 다니는 목재 다리다. 자연 속에서 튀지않고 그 일부가 된 멋진 다리. 그 위에서 보는 강도 좋았지만, 좋았던 건 다리 옆 풍경이었다. 강변 잔디밭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돗자리를 펴고 앉은 가족, 나무 그늘에 누운 연인, 아이스박스를 열어놓고 둘러앉은 무리. 저녁 일곱 시가 넘었는데도 대낮 같은 햇빛 아래에서 다들 느긋했고, 보기 참 좋았다. (초상권이 있어 대놓고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 관광객이 관광지를 소비하는 풍경이 아니라, 사는 사람들이 자기 동네 강가에서 저녁을 보내는 풍경이었다. 로키에 와서 절경만 보고 다니다가, 이런 평범한 저녁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다.


세인트 메리 성당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세인트 메리 성당(Saint Mary Catholic Parish) 앞을 지났다. 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촛불을 봉헌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열여섯 해 전 이 마을에 데려왔던 그 아이들은 이제 다 자랐다. 그때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 보우강이 예쁜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강이 보이고 대신 듬직한 남편만이 내곁을 지키고 있다. 기도를 마치고 성당을 나섰을 때 하늘이 아직 환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저녁 여덟 시가 훌쩍 넘었는데도 낮이었다.



이날 나는 두 개의 마을을 지나왔다. 오전의 캔모어는 석탄을 캐던 땅이 백 년에 걸쳐 쉼의 땅이 된 곳이었고, 오후의 밴프는 애초에 쉼을 위해 지정된 땅이었다. 새벽부터 깨어 있었고, 두 시간 가까이 운전했고, 강변을 걸었고, 시차에 시달렸다. 캔모어에서는 계획했던 호수에 가지도 못했고, 벤치에서는 모기 때문에 십 분을 못 앉았다. 긴 하루를 보내고 몸은 많이 지쳤으나 정신은 오히려 맑아졌고 마음은 편안했다.
한국에 두고 온 일들, 처리해야 할 목록, 신경 쓰이던 관계들, 머릿속에서 계속 돌아가던 잡음들. 그것들이 이날 하루 사이에 조용해졌다. 대신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채웠다. 흙길에서 나던 자갈 소리, 낯선 이름이 적힌 벤치, 대공황기 실업자들이 쌓아 올린 건물과 정원, 다리 아래에서 첨벙거리던 젊은이들, 그리고 16년 만에 다시 본 보우강의 매력 등등.
일상의 번잡함이 물러난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는 일. 여행이란 회복의 시간인 것같다. 일상의 무게를 다 내려좋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에 감사했다. 시간이 늘어난 하루, 잡음이 사라진 머리. 나의 쉼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날 밤도 나는 새벽 두 시에 깼다. 창밖은 캄캄했고 산은 보이지 않았지만, 산이 거기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산의 기운이, 정기가 나에게 주는 에너지를 가득 받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몇 시간 뒤면 로키에서 가장 유명한 두 호수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to be continued)
https://booksharp.tistory.com/116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① 캔모어 보우강 트레일과 엔진 브리지
캐나다 로키(Rocky) 산맥은 북미 대륙의 등뼈가 멋지게 솟아오른 구간이다. 빙하가 깎은 봉우리와 에메랄드빛 호수가 계속 이어진 네 개의 국립공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booksharp.tistory.com
'여행 인사이트 > 북미 인문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⑥ 아이스필즈 파크웨이 - 아름다운 길, 사라지는 빙하 (0) | 2026.10.18 |
|---|---|
|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⑤ 밴프의 느린 길 : 존스턴 캐니언에서 설퍼산까지 (0) | 2026.10.14 |
|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④ 낮 한시에 일어나 만난 요호 국립공원 (1) | 2026.10.07 |
|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③ 아픈 발로 25,000걸음 걷다. (2) | 2026.10.05 |
| [캐나다] 로키(Rocky) 자유여행 ① 캔모어 보우강 트레일과 엔진 브리지 (1) | 2026.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