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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사이트/동남아시아 인문기행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을 움켜쥔 5대 성씨(五大姓) (2)

by 된장언니 2026. 9. 7.

조지타운(George Town) ② — 바다를 건너온 다섯 집안 이야기 

 

 

[말레이시아, 페낭] 조지타운을 움켜쥔 5대 성씨(五大姓) (1)

조지타운(George Town) ① — 새벽 거리 풍경, 구씨사당 용산사와 비밀결사우리는 좁은 골목을 상상하고 왔다말라카의 존커 스트리트,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야 하던 그 좁은 길을 떠올리며 조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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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는 구공시(용산당 龍山堂)와 5대 가문의 비밀결사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제 나머지 네 성씨집안(사씨, 임씨, 진씨, 양씨)을 차례로 돌아본 이야기를 하겠다.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Victoria Street, Penang (출처: https://kiahkiean.com/)

 

2.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 도심 한복판의 잔디밭

먼저 찾아간 곳은 사공시(세덕당 世德堂)였다. 1편에서 건덕당의 근거지 복덕정신묘를 봤던 그 거리, 아르메니안 스트리트 8번지다. 1810년 무렵 조직되어 1820년에 문중 명의로 부동산을 사들였고, 지금의 사당 건물은 1858년에 완성됐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관광객 입구 (옆 사무실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입장한다.)

 
여기서 가장 놀란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잔디였다.
다섯 사당 중 마당이 제일 넓다. 그것도 화강암이나 시멘트가 아니라 잔디밭이다. 아이들이 뛰어놀 만한 놀이터쯤 되는 넓이, 어림잡아 구공시 앞마당만 한 자리가 통째로 초록이었다.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다듬은 관목과 그네 벤치가 놓여 있다. 관리 상태가 놀랍도록 좋았다. 잔디의 결이 고르고 잡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지타운 한복판이다. 이 자리의 땅값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넓이 자체가 재력이다. 건물을 크게 짓는 것보다 도심 한가운데를 비워두는 편이 훨씬 어렵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잔디 건너편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世德堂(세덕당)」과 「謝府(사부)」라고 적힌 깃발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하는 그림. 지금은 비어 있는 이 마당이 원래 무엇을 하던 자리였는지 알려준다. 건물은 붉은 벽돌에 정자 모양의 배정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이층 난간은 검은 주철에 금색 장식이 박혔다. 처마 밑으로는 사자 머리가 줄지어 나왔다. 옆쪽 편액에 「寶樹(보수)」 두 글자가 걸려 있는데, 사(謝)씨 집안이 오래 써온 당호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1) 왜 하필 관우인가

제단에는 두 신이 나란히 앉아 있다. 왼쪽은 청수조사(淸水祖師). 얼굴이 검은 푸젠의 민간 신이다. 오른쪽은 붉은 얼굴에 초록 갑옷을 두른 관공(關公), 곧 관우다. 그 양옆으로 작은 의장(儀仗) 창들이 줄지어 꽂혀 있다. 흥미로운 점은 1편에서 본 구공시는 왕손대사, 이곳 사공시는 관우를 수호신으로 섬긴다. 두 신 모두 장군이다. 그리고 뒤에 갈 진공시의 수호신도 장군이었다.
 
그런데 관우는 조금 다르다. 그는 무신인 동시에 상인의 신이다. 중국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의리와 신용의 상징으로 관우를 모셨고, 재물신으로도 섬겼다. 칼과 재물을 모두 섬길 수 있는 신인 것이다. 바다를 건너와 무장 결사를 만들고, 광산과 아편 청부로 돈을 번 사람들에게 이보다 확실한 신은 없었을 것이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 청수조사(淸水祖師)와 관우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또한, 세덕당 조상 위패 앞에는 광혜성왕(廣惠聖王)이 모셔져 있다. (앞쪽 향로에 붉은 종이로 ‘廣惠聖王’이라 적혀 있다.) 광혜성왕은 사(謝)씨 문중의 사당인 사공시에서 가문의 가장 위대한 시조이자 수호신으로 받드는 동진(東晉)의 명재상 ‘사안(謝安, 320~385)’이다.
중국 역사에서 '비수대전(淝水之戰)'을 승리로 이끌어 나라를 구한 동진의 정승 사안은 사후 신격화되어 푸젠성(복건성) 일대에서 '광혜성왕', '사성왕(謝聖王)'으로 숭배되었다. 사씨 문중이 동남아로 이주하면서 가문의 뿌리이자 수호신으로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이다. 
광혜성왕의 오른쪽, 검은 얼굴에 수염을 기른 신은 도교 사당에서 함께 배향하는 수호 장군/무신이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 광혜성왕(廣惠聖王)

2) 가짜 금괴 두 상자

전시실에서 가장 오래 서 있었던 곳은 따로 있었다. 오래된 철제 금고가 뚜껑을 연 채 놓여 있고, 그 안이 금괴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 고전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그 금괴! ~ 붉은 천 위에 원보(元寶) 모양 금덩이와 금괴가 줄을 맞춰 놓여 있고, 위에 유리를 덮어두었다. 물론 가짜다. 그런데 두 상자나 있다. 이 집안이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상도, 신도, 건축도 아니고 재력(금)이다.

사공시(謝公司), 세덕당(世德堂)

 
여기서 하나 짚고 가야겠다. 우리가 계속 써온 '공시(公司)'는 지금 중국어로 그냥 '회사'를 뜻하는 말이다.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면서 동시에 자본을 굴리는 회사. 제사 공동체이자 사업 조직인 것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가짜 금괴를 두 상자나 유리 밑에 눕혀놓을 만큼. 
 
 

3.  임공시(林公司), 구룡당(九龍堂) : 성씨로 가득 찬 대문

아르메니안 스트리트에서 비치 스트리트(르부 판타이)로 나왔다. 은행 건물들 건너편에 '임공시(구룡당 九龍堂)'가 있었다. 1863년에 세워져 1866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고, 삼도 아오관촌 출신 임씨들의 사당이다. 이 집안이 모시는 신은 마조(媽祖), 바다의 여신이다. 은행가 한복판에서 뱃사람의 신, 마조를 모신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임공시(林公司), 구룡당(九龍堂) 대문

 
특히 눈길이가고, 재미있었던 것은 대문이었다. 철문 격자에 임(林) 자가 붉은 쇠막대로 박혀 있다. 하나가 아니다. 위아래로 좌우로, 세다가 열을 넘겼다. 볕이 기울면 그 글자들의 그림자가 벽에 한 번 더 찍힌다. 성씨가 두 배로 늘어난다.
 
건물 정면도 마찬가지다. 초록 대나무 발 위에 「林氏九龍堂」(임씨구룡당)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고, 그 아래 같은 이름이 로마자로 한 번 더 적혀 있다. LIM KONGSI, KEW TONG. 중국어를 못 읽는 사람에게도 이 집이 누구 집인지 알리겠다는 뜻이다. 
 

임공시(林公司), 구룡당(九龍堂)

1) 과거시험 급제자가 나온 집안

안으로 들어가면 왜 이 집안이 그렇게까지 이름을 새겼는지 알 것 같아진다. 안쪽 벽이 통째로 조상의 위패다. 금빛 위패가 천장 가까이까지 층층이 꽂혀 있고, 그 수가 수백 개다. 이 벽 앞에 서면 이 집안이 왜 담벼락까지 성씨로 채워뒀는지 조금 알 것 같아진다. 들보 아래로는 금박 편액이 빽빽하다. 그중 「進士(진사)」라고 적힌 편액이 둘 걸려 있다. 진사는 과거 시험 최종 합격자를 말한다. 문중에서 급제자가 나왔다는 뜻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당시 중국 사회에서 상인은 아무리 부자여도 사농공상의 맨 아래였기 때문이다. 그 서열을 뒤집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 과거 급제였다. 주석과 아편으로 돈을 번 항구도시 한복판에서, 이 집안이 가장 높은 자리에 금박으로 걸어둔 것은 돈이 아니라 시험 합격증이었다. 다만 이 시절에는 조정에 큰돈을 기부하고 학위를 받는 길도 있었다. 연납(捐納)이라고 한다. 
 

임공시(林公司), 구룡당(九龍堂) - 進士(진사)라고 쓰여진 퍈액 두개가 나란히 보인다.
임공시(林公司), 구룡당(九龍堂)

2) 조상을 섬기는 마음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갔을 때는 사당 한쪽에 과일 상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 여성 몇 분이 분주히 오가며 그것들을 상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무슨 제사가 있었을 것처럼. 낯선 나라에 건너와 악착같이 살아남고, 가문을 지키고, 그러는 내내 조상에게 기대어 기도했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백오십 년이 지난 오늘 아침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4.  진공시(陳公司), 영천당(潁川堂) : 페낭에서 가장 오래된 집안

진씨 사당은 여기서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비치 스트리트를 따라 내려가다 안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진가방(陳家坊, Seh Tan Court)이 나온다. 양옆으로 민가가 늘어선 그 안쪽에 네모난 마당이 있고, 마당 앞에 진공시(영천당 潁川堂)의 패루가 서 있다. 패루 지붕 위에는 초록 용 두 마리가 마주 서고, 그 아래 「潁川堂(영천당)」 세 글자가 금색으로 걸렸다. 양쪽 붉은 벽에는 둥근 창이 하나씩 뚫려 있다.

패루(牌樓)는 길이나 마당 입구에 세우는, 건물이 딸리지 않은 중국식 대문이다. 
기둥 몇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기와)을 얹어서, 문짝도 벽도 없이 그냥 "여기부터가 우리 구역"이라는 걸 표시하는 구조물로,
차이나타운 입구에 서 있는 그 큰 문, 중국 사찰 진입로에 서 있는 문 — 그게 다 '패루'다.

 

진공시(陳公司), 영천당(潁川堂)
진공시(陳公司), 영천당(潁川堂)

 
안내판을 읽다가 놀랐다. 이 집안이 페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조직이었다고 한다.  진씨 문중이 대가(大街, China Street) 13호에 첫 공동 재산을 사들인 것이 1810년이다. 그 집의 소유증명서인 지계(地契) 두 장이 벽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이 사당의 원래 이름은 진성왕공시(陳聖王公司)였다. 1831년 무렵 문중은 푸젠 윈샤오(雲霄)에 있던 조묘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위혜묘(威惠廟)를 세운다. 여기서 모시는 신이 '개장성왕 진원광(開漳聖王 陳元光)'이다. 이름 그대로 '장주(漳州)를 연 성왕', 당나라 때 이 지역을 개척한 장수다. 제단에 금빛 인물상 세 구가 나란히 앉아 있는데, 좌우에는 부장 보순장군(輔順將軍)과 보승장군(輔勝將軍)이라고 한다. 여기도 역시 수호신이 장군이다. 구공시에서 본 왕손대사도 장군이었는데,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왕손대사는 사(謝)씨 인물이었지만, 개장성왕은 진(陳)씨다. 진씨 사당이 진씨 조상을 수호신으로 모신다. 
 

진공시(陳公司), 영천당(潁川堂)

 
지금의 건물은 1878년에 완성됐다. 대가에서 이 자리로 옮겨오면서 새로 지은 것이다. 1917년에는 진씨 학교를 열어 화교 자제들을 가르쳤다. 마당 앞에 선 패루는 원래 없던 것으로, 1949~51년 보수 때 덧붙여졌다고 한다. 한 가지 더. 진씨는 오대 성씨 중 유일하게 삼도(三都) 출신이 아니다. 나머지 네 집안이 하이청 삼도의 마을들로 촘촘히 묶여 있을 때, 이 집안만 다른 계통이었다.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가장 이질적인 집안인 셈이다.
 

진공시(陳公司), 영천당(潁川堂)

 
 

5.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 바다를 마주 본 유일한 사당

마지막으로 출리아 스트리트(Gat Lebuh Chulia) 3번지, 양공시(하양식덕당 霞陽植德堂)로 걸어갔다. 길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붉은 대문이다. 금색으로 霞陽(하양) 두 글자가 박혀 있고, 문 위 지붕에는 초록 용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섰다. 흰 담장 너머로 야자수와 기와지붕이 넘어온다. 대문만 놓고 보면 구공시에 밀리지 않는다.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출처 : 구글, 양공시 제공)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이 너무 수수하다. 처음엔 조금 김이 빠졌다. 구공시의 그 지붕을 보고 온 눈이라 더 그랬다. 그런데 걸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대 성씨라고 다 같은 규모로 지은 것이 아니다. 대문은 거리를 향하고, 건물은 문중을 향한다. 밖에서 보이는 데까지만 격을 갖추고 안쪽은 실용에 맡긴 집이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옆에 따로 서 있는 건물이었다. 
 
옆에 서있는 건물(아래 사진)은  「霞陽植德堂楊公司議厅」 (하양식덕당 양공시 의청, 1929년 건립)으로 문중이 회의를 하던 건물인데, 생김새가 사당과 전혀 다르다. 코린트식 기둥머리에 서양식 박공, 대나무 발이 드리운 이층 베란다. 그 난간에는 문중 이름이 로마자로 박혀 있고, 양쪽 끝 둥근 장식에 새겨진 것은 '달러 기호($)'다. 사공시가 가짜 금괴를 유리 상자에 눕혀 보여줬다면, 양씨네는 아예 돈의 기호를 회의실 정면에 달았다. 대놓고 장사꾼^^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양공시(陽公司),  하양식덕당(霞陽植德堂)

 
이 문중은 규약이 특이하기로도 유명하다. 삼도 샤양촌(霞陽) 출신 양씨만 회원으로 받았다. 성씨가 같아도 마을이 다르면 안 됐다. 대문에 걸린 금색 두 글자가 바로 그 마을 이름이다. 페낭에서 이들이 무엇을 붙들고 버텼는지가 저 두 글자에 다 들어 있다. 
 
그리고 하나 더. 1830년대에 세워진 이 사당은 오대 성씨 중 유일하게 바다를 마주 보고 있었고, 다른 네 집안에는 없던 것을 가지고 있었다. 문중 소유의 부두. 구씨는 숍하우스 틈 안쪽 마당으로 들어갔고, 사씨는 아르메니안 스트리트의 사당 안으로, 임씨는 은행 건물 사이로, 진씨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들 뭍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양씨만 물가에 남았다. 
 


마무리 지으며

 
다섯 사당의 구조가 전부 같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수호신이 앉아 있다. 구공시는 왕손대사, 진공시는 개장성왕, 사공시는 청수조사와 관우, 임공시는 마조. 수호신을 모신 곳 앞에는 기본 문법처럼 향로가 놓이고 초가 켜져 있다. 그런데 그 신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벽 한 면이 통째로 조상의 위패다. 금빛 나무패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층층이 꽂혀 있다. 예외가 없다. 
 
수호신은 바깥을 향해 앉는다. 방문객이 보는 자리, 향을 사르는 자리, 축제 때 가마에 실려 거리로 나가는 자리다. 사공시 잔디밭 벽화의 그 행렬이 바로 그것이다. 조상의 위패는 더 깊숙한 안쪽에 모셔져 있다. 문중 사람이 아니면 굳이 들어갈 일이 없는 자리, 제사 때만 상이 차려지는 자리다. 수호신이 조상들 위패 앞에 버티고 앉아서 보호하는 구조이다.
 
한나절을 걷고 나니 조지타운의 지도가 다르게 읽혔다.
5대 성씨의 사당들은 전부 큰길에서 한 발 비켜난 자리에 있었다. 숍하우스 틈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구공시 마당, 민가에 둘러싸인 진가방의 진공시, 은행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 임공시, 그리고 담장 안쪽에 통째로 잔디밭을 숨겨둔 사공시. 무엇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은밀하게 감춰두려 했을까?
 
가문의 사당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구공시의 경우를 보면 그 집요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894년 남부 푸젠에서 장인을 불러다 새 사당을 짓기 시작해 8년을 들여 완성했는데, 1901년 음력 설 전야에 원인 모를 불로 전부 타버렸다. 지나치게 화려하여  신이 노한 것이라며, 문중은 이듬해 곧바로 규모를 줄여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1906년 완공)  두 차례의 건축에 모두 13년, 각각 10여만 달러가 들었다. 
 
먼 중국에서 고향을 떠나올 때부터, 그들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을 단위로 뭉쳤고, 결사로 묶였고, 사당을 함께 지었다. 페낭이라는 낯선 항구에서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자본은 '가문' 혹은 '핏줄'이었다. 
 

다양한 중국 이민자의 혈연,지연의 근본이되는 사당과 회관(서원)들
다양한 중국 이민자의 혈연,지연의 근본이되는 사당과 회관(서원)들
다양한 중국 이민자의 혈연,지연의 근본이되는 사당과 회관(서원)들
다양한 중국 이민자의 혈연,지연의 근본이되는 사당과 회관(서원)들

 

그들은 왜 여기까지 왔나

한 가지 짚고 넘어가려 한다. 본토에서 잘 나가던 사람은 보통 집을 떠나지 않는다. 배를 타는 것은 고향에서 답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푸젠지역 남부는 특히 그랬다. 이 지역을 두고 예부터 「팔산일수일분전(八山一水一分田)」이라고 했다. '여덟은 산이고, 하나는 물이고, 나머지 하나가 밭'이라는 뜻이다. 인구는 느는데 땅은 그대로였으니 답은 바다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정타가 하나 있었다. 1661년, 청 조정이 천계령(遷界令)을 내린다. 대만으로 물러난 정성공 세력의 보급을 끊겠다는 것이었다. 내용은 이랬다. 바닷가에서 30리 안쪽에 사는 주민은 열흘에서 보름 안에 전부 내륙으로 옮길 것. 강남·저장·푸젠·광둥·산둥·직례 여섯 개 성이 대상이었다. 집도 배도 밭도 버리고 강제로 떠나야 했다. 기록은 "흩어져 떠돌다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진다"라고 적혀있다. 이 정책은 20년 넘게 이어지다가 1684년 대만이 평정된 뒤에야 완전히 풀린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이 없던, 즉 가진 것이 없던 사람들이 배를 탔다.

그러니까 페낭에 도착한 사람들은 기회를 찾아 나선 모험가라기보다, 밀려나듯 떠나온 쪽에 가까웠다. 오대 성씨가 그토록 악착같이 뭉치고, 그토록 크게 사당을 지은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잃어본 사람은 다시는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아침 일곱 시에 나선 것이 더위를 피하려던 것이었는데, 결국 소용없었다. 밥 먹는 시간 빼고 늦은 오후까지 걸었던 것 같다. 옷은 땀에 흠뻑 젖었고, 다리는 무거웠다. 고향을 떠나 이렇게 무더운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5대 가문을 생각하니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짠~했다. 
 
이백 년 전 고향을 떠나 배를 탔던 사람들은 이 항구를 목적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사당을 짓고 터전을 닦았다.

돌아갈 사람은 사당을 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