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의 페낭(Penang) 여행. 우리의 여정은 조지타운(George Town)에 위치한 이스턴 앤 오리엔탈 호텔(Eastern&Oriental Hotel, 이하 E&O 호텔) 체크인과 함께 시작되었다.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 설렘도 잠시, 호텔 예약부터 일정까지 모든 것을 오롯이 언니에게 맡긴 터라 아무런 준비 없이 낯선 호텔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호텔 입구에 들어서자 나이가 지긋한 말레이시아인 도어맨이 사파리 탐험가 옷을 입고 우리를 맞이했다. 19세기말 영국 식민지 시절의 헤리티지와 '대영제국 그랜드 투어'의 역사를 투숙객에게 그대로 재현하기 위한 장치였다. 미색 사파리 수트에 긴 흰색 양말, 그리고 머리에 쓴 탐험가 모자(피스 헬멧, Pith Helmet)는 당시 조지타운을 지배하던 영국인들의 전형적인 열대지방 유니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크인을 하면서 몇 가지 아쉬운 인상을 받았다. 카운터의 전화기는 계속 울려대는데도 아무도 받지 않았고, 우리를 담당한 직원은 뜬금없이 세금(Tax)이라며 600링깃을 요구했다. 언니가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다며 몇 마디 짚어내자, 그제야 갑자기 6링깃을 결제하라고 말을 바꿨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서 '총무'라는 중책(?)을 맡았기에 일단 카드로 결제를 마쳤다. 살짝 상했던 마음은 이내 눈 녹듯 사라졌다. 1885년에 오픈해 유서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호텔 로비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마주하자 어두웠던 기분이 환하게 개었다. 게다가 무료 조식에 한 번, 저녁 시간에 제공되는 칵테일과 카나페 무료 서비스에 또 한 번, 낮 동안 커피와 티, 다과를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만족을 느끼며 기분 좋게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O 호텔의 역사
E&O 호텔의 역사는 페낭의 식민지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차(Tea) 무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인도와 중국을 잇는 중간 항로이자 교두보로 페낭을 낙점했다. 당시 말라카 해협 중앙은 네덜란드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의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 선장은 시암(태국)과 부기스족의 위협을 받던 케다(Kedah) 왕국의 술탄에게 접근했다. 군사적 보호를 조건으로 1786년 페낭섬을 조차하며 영국의 첫 거점을 확보한 것이다. 영국은 이 섬을 국왕 조지 3세의 이름을 따 '프린스 오브 웨일스 아일랜드(Prince of Wales Island)'로 명명했고, 중심지를 '조지타운(George Town)'이라 불렀다. 이후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가 획기적으로 단축되었고, 조지타운은 무역항으로서 급성장했다. 이러한 번영의 흐름 속에서 1885년, 지금의 E&O 호텔이 문을 열게 되었다.


E&O 호텔은 이란계 아르메니아인인 사키스 형제(Sarkies Brothers)에 의해 세워졌다. 이미 내 블로그의 <아르메니안 교회> 포스팅에서 싱가포르 래플스 호텔(Raffles Hotel)을 세운 이들로 소개한 바 있는 바로 그 형제들이다. 마틴(Martin), 티그란(Tigran), 아비에트(Aviet), 아샤크(Arshak)까지 총 네 명으로 이루어진 이 사키스 형제는 동남아시아 고급 호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이들은 1884년 이스턴(Eastern) 호텔을 먼저 오픈한 뒤, 이듬해인 1885년에는 '호텔 드 레퓌브(Hotel de l'Europe)'를 인수해 오리엔탈(Oriental) 호텔을 설립했다. 그리고 1889년, 이 두 호텔을 하나로 합치면서 지금의 이스턴 앤 오리엔탈 호텔(The Eastern & Oriental Hotel)을 완성했다. 사키스 형제가 동남아 일대에 구축한 명문 호텔의 라인업은 실로 화려하다. 싱가포르의 래플스 호텔(1887년)과 더 씨 뷰(The Sea View, 1906년, 현재 철거됨)를 비롯해, 미얀마 양곤의 더 스트랜드(The Strand), 그리고 페낭의 크래그 호텔(Crag Hotel, 1885년, 현재는 폐가로 방치됨) 등이 모두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E&O 호텔은 20세기 초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안선을 가진 호텔"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조지타운 최고의 숙소이자 사교장이 되었다. 1903년 대형 볼룸이 증축된 이후에는 매년 화려한 무도회와 연회가 개최되었으며, 영국인 엘리트와 정재계 인사들이 매주 금요일마다 모여 교류했다.


이곳에는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서머셋 모옴(Somerset Maugham), 루디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쑨원(Sun Yat-sen),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 등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인 문학가, 예술가, 정치가들이 머물렀다. 호텔에서 이들의 흔적을 기려 명명한 '작가들의 스위트룸(Writers Suites, 작가의 방)'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번영하던 호텔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사키스 가문이 파산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중 페낭이 일본군에 점령당하면서 조지타운과 E&O 호텔은 암흑기를 겪게 된다. 호텔은 잦은 소유주 변경과 함께 쇠락해 갔다. 반전은 1990년대 후반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일어났다. 특히 2008년 조지타운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도시와 호텔은 다시금 부활했다. 이처럼 페낭의 역사를 고스란히 투영하는 E&O 호텔은 투숙객에게 언제나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19세기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들이 구가했던 번영의 잔재를 오늘날 클래식한 헤리티지로 마주할 수 있는 독보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헤리티지 윙(Heritage Wing) 투숙과 더 콘 웰리스( (The Cornwallis) 라운지

E&O 호텔은 19세기 식민지 시절의 웅장함을 그대로 간직한 '헤리티지 윙(Heritage Wing)'과 현대적인 감각의 '빅토리 어넥스(Victory Annexe)'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묵은 헤리티지 윙은 1885년 오픈 당시의 고전적이고 우아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앤티크한 목재 가구, 고풍스러운 페르시아풍 카펫, 그리고 욕실의 클래식한 타일과 욕조는 물론 작은 손잡이 하나까지도 내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헤리티지 윙의 객실은 모두 정원이나 바다가 보이는 뷰라고 들었는데, 우리가 조금 저렴하게 예약한 탓인지 우리 방은 도로 뷰였다. 밤에 잠을 청하려는데 자꾸 오토바이 특유의 소음이 신경 쓰여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뿔싸, 주유소가 떡하니 우리 방 앞에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내 마음을 사로잡은 또 다른 치트키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웰컴 티 대신 무려 '웰컴 와인'이 제공되었고,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료(맥주, 콜라 등)가 무료 미니바 서비스였다! 여기에 헤리티지 윙 투숙객만을 위한 전용 수영장, 그리고 무료 칵테일과 카나페 서비스까지 제공되니 객실 뷰의 아쉬움쯤은 눈 녹듯 사라졌다.



1층 '더 콘월리스(The Cornwallis)' 라운지에서 제공하는 무료 칵테일과 카나페 타임은 하루에 딱 한 시간, 오후 6시부터 7시까지다. 6시가 조금 넘어 라운지에 들어서니 이미 헤리티지 윙 투숙객들로 가득 차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짜 서비스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라운지에는 여러 종류의 와인이 구비되어 있었고, 바텐더는 투숙객의 요청에 맞춰 다양한 칵테일과 커피 등을 즉석에서 만들어 주었다. 카나페 또한 맛이 훌륭할 뿐 아니라 종류도 다채로워서 기대 이상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덕분에 나와 언니는 저녁 식사를 이 무료 카나페로 알차게 해결하며 식비 지출을 크게 아꼈다. 이번 여행의 총무로서 가장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순간이었다.
두 곳의 수영장에서 몸만 담그다


첫날, 우리는 짐을 풀고 헤리티지 윙 투숙객 전용 수영장으로 향했다. 1층 '더 콘월리스(The Cornwallis)' 라운지와 연결된 이 수영장은 해변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수영을 즐길 수 있는 멋진 뷰를 자랑했다. 해가 지려면 아직 두 시간쯤 남은 시간, 뜨거운 태양을 감수하고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그런데 순간, 대중목욕탕 열탕 같은 수온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날씨가 아무리 덥다 한들 물이 이 정도로 데워질 수 있다니. 우리는 몇 번 첨벙거리다가 마치 대중목욕탕에서 수영을 한 듯한 기분으로 씁쓸하게 풀에서 나왔다.




빅토리 어넥스 건물 6층에도 인피니티 풀(Infinity Pool)과 헬스장(Gym)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건물 중앙에 위치한 덕분에 그늘도 많고 분위기도 한결 좋아 보였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이곳에서 운동을 좀 한 뒤, 인피니티 풀에서 몸을 식히자고 다짐했다. 역시 여행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피로가 쏟아져 늦잠을 자는 바람에 운동은 가볍게 패스하고 수영만 하기로 했다. 오전 8시쯤 수영장에 올라가니 마침 한 무리의 투숙객이 수영을 마치고 자리를 뜨고 있었다. 마치 우리만의 전용 풀이 된 것 같아 기분 좋게 물에 발을 들였다. 물 온도도 적당했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은 1층과는 또 다른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수영 운은 지독히도 없었나 보다. 물에 들어간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 많은 비도 아니었건만, 안전 관리 직원이 다가와 비가 오면 수영을 할 수 없다며 밖으로 나오라고 안내했다. 싱가포르도 그렇지만 열대지방은 비가 올 때 낙뢰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안전상의 이유로 수영을 엄격히 금지하는 듯했다. 결국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딱 10분 수영한 뒤, 다시 샤워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또 한 번 겪으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바닷가의 자바 올리브 나무(Java Olive Tree)



E&O 호텔 앞 바닷가를 거니는 동안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 났다. 파도는 조금 거칠었고, 인근 인도네시아의 거대한 산불로 인해 공기는 헤이즈로 뿌옇게 흐려 있었지만, 눈앞의 바다는 세상의 모든 상념과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주는 듯했다.


바닷가에서 한눈에 보이는 자바 올리브나무는 페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낙엽수이다. 이 호텔 바닷가에 우뚝 선 이 웅장한 나무는 1885년 호텔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사실 이 나무야말로 페낭의 파란만장한 세월을 묵묵히 지켜봐 온 역사의 증인이다. 오늘날에는 나무 곁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수많은 연인의 아름다운 혼인 증인이 되어주기도 한다. 높이가 4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자바 올리브나무와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역시 이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겼나 보다.

내가 동인도 제도에서 마주친 가장 아름다운 호텔… 멋진 객실 앞으로 갈색빛을 띤 녹색 바다가 벽에 부딪쳐 찰랑거렸고, 붉은빛이 도는 모래사장 속에는 품격 있고 커다란 나무들이 저녁 공기 속에 우뚝 서 있었다.
The most beautiful hotel that I came across in the East Indies... with a splendid apartment in front of which the brown-green ocean lapped against the wall and in the reddish sand, big dignified trees stood in the evening.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인도에서 (Aus Indien)》, 베를린, 1913년
호텔에서의 갤러리 산책





E&O 호텔의 복도를 걷다 보면 전통적인 체크무늬 타일 바닥과 흰색 아치형 기둥, 클래식한 조명이 어우러져 마치 우아한 미술관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공간을 채운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와 페라나칸 건축 양식의 전통 타일, 그리고 곳곳에 걸린 스케치와 그림들은 호텔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갤러리로 만들어 준다.



실제로 빅토리 아넥스 1층의 기념품숍 옆에는 E&O 갤러리가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아날로그식 수동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역사적 유물들이 호텔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머무는 것만으로도 호텔의 깊은 역사와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2년 전 마이크 히긴스(Mike Higgins)라는 이가 이 호텔을 예찬하며 쓴 시가 E&O 갤러리에 소개되어 있다. 호텔 구석구석을 유유히 거닐다 보면, 시에 담긴 절절한 구절들이 어느새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페낭 – E&O 호텔 (PENANG – The E&O Hotel)
대영제국의 가장 먼 발치, 말라카 해협 안쪽
해로의 좁은 틈새 속에 페낭이라는 식민지 전초기지가 있었네.
그곳에선 한때 향신료가 상인들이 거래하던 화폐였고
해적들은 자신들이 노리던 배에서 그 귀한 전리품을 약탈했었지.
달의 딸, 섬의 빛나는 진주,
래플스 호텔의 언니이자 사키스 형제의 또 다른 여인.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녀는 마법의 주문을 걸어왔네.
위대한 여인(La Grande Dame) – 조지타운의 여왕, E&O 호텔.
페어뱅크스, 키플링, 코워드가 한때 그녀의 빛나는 홀을 빛내주었고,
채플린과 픽포드는 파콰르 거리의 벽을 따라 '연합(United)'을 이루었네.
오늘날 그녀는 세월도 지울 수 없는 식민지 시대의 유산,
그 특별한 시간과 공간의 증거로 서 있구나.
이제 더 이상 이국적인 동양을 찾아 나서는 용맹한 여행자는 없지만,
그녀의 손님들은 매서운 겨울을 피해 찾아온 철새(휴양객)에 더 가깝다네.
제국의 저무는 통치 속에서 그 시절을 꿈꾸며,
우리가 다시는 보지 못할 웅장하고 영원한 시대를 그리워하네.
마이크 히긴스(Mike Higgins) – 2024년 2월

한여름의 무더위를 뚫고 이곳에 온 나는 시 속의 용맹한 여행자도, 겨울을 피해 온 철새도 아니지만, 이 호텔에서 이국적인 동양의 색채와 이채로운 서양의 풍취를 동시에 만끽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유럽인들은 제국주의 시절 조상들의 영광을 그리워할 테고, 그 역사의 피해자였던 동양인들은 그들의 만행을 떠올리는 동시에 '참 대단하게도 누리고 살았구나' 싶어 부러워 하는 복잡한 심경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페낭의 본격적인 명소들을 둘러보기도 전에, 이 호텔에서 섬의 압축된 공기를 먼저 호흡할 수 있어 참 좋았다.
하지만 총무로서의 마지막 임무인 '정산' 단계에서 반전이 있었다. 호텔에서 결제된 카드 내역을 보니 6링깃이 아닌 64.8링깃이 긁혀 있었던 것이다. 이미 호텔을 떠난 뒤라 돌이켜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호텔에 낸 세금 6링깃과 헷갈린 내 기억의 오류인지, 아니면 그들의 세련된 속임수인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지만 그냥 툴툴 털어버리기로 했다. 고작 2만 원 남짓한 돈 때문에, 내 마음속에 이토록 깊고 우아하게 자리 잡은 이 호텔의 매력을 반감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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