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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사이트/동북아시아 인문기행

[몽골] 만주시르 사원(Manzushir Khiid) & 복드 칸 산(Bogd Khan Uul)

by 된장언니 2026. 6. 29.

6월 중순의 주말, 몽골 여행의 첫 여정으로 복드 칸 산(Bogd Khan Uul) 자락에 위치한 만주시르 사원(Manzushir Monastery)을 찾았다.

울란바토르에서 남쪽으로 약 40km.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초원 특유의 서늘한 공기와 말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적당히 구름 낀 흐린 날씨가 쾌적했다. 폐허가 된 역사적인 사원이라고 해서 마냥 고요하고 적막할 줄 알았는데, 주말을 맞아 나들이를 나온 몽골인들로 활기가 넘쳤다. 아름다운 계곡과 바위산, 그리고 말과 소들, 야생화까지...  대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유목민의 후예다운 자연스러운 삶의 여유가 느껴졌다. 

복드 칸 산 중턱의 만주시르 사원(Manzushir Khiid) 뒤편에서 내려다본 전경

칭기스칸의 후예와 바람을 가르는 말(馬)들

차에서 내려 사원을 향해 걷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줄지어 선 말들이었다. 크고 작은 갈색, 흰색, 얼룩무늬 말들이 이미 안장을 얹은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델(deel, 몽골 전통 옷)을 차려입은 마부들이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쉬고 있었다. (사원으로 오르는 길에서 이 말을 타고 마부들과 함께 내려오는 몽골인들을 많이 만나 볼 수 있다) 넓은 초원과 가파른 산을 누비며, 말과 함께 호흡하던 칭기스칸의 후예들이 관광객을 기다리며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다. 저 말들도 힘차게 초원을 달리고 싶을 텐데... 

 

몽골에는 '말(馬)이 없는 몽골인은 날개 없는 새와 같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다. 몽골 말(馬)은 체구는 작지만 엄청난 지구력을 자랑하며, 거친 풀만 먹고도 영하 40도의 겨울을 버텨낸다.  광활한 초원과 험준한 지형, 혹독한 겨울을 견뎌야 하는 몽골인들에게 말(馬)은 삶의 일부이자 영혼의 단짝이다. 몽골 아이들은 보통 3~5살 무렵, 걷고 뛰는 것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말(馬) 타는 법부터 배운다고 한다.

 

1206년, 테무진이 몽골 초원의 부족들을 통일하고 대칸(大汗)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기병(騎兵)이었다. 몽골 기마군단은 하루에 최대 1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고 한다. 어마무시한 기동력이다. 병사 한 명당 서너 마리, 많게는 스무 마리의 말을 교대로 몰아 지치지 않고 달렸고, 전투 중에는 말 옆구리에 몸을 숨긴 채 말 목 아래로 활을 쏘았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그래서 칭기스칸이 "말(馬) 위에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쉽다."라고 했나 보다. 

말들과 델을 입은 마부들

몽골인들의 정신세계에는 '히모리(Hiimori)'라는 개념이 있다. 직역하면 '바람의 말(Wind Horse)'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생명력, 기운, 영혼, 그리고 행운을 상징한다. 몽골인들은 우리나라 성황당 같은 '어워(Ovoo)'에 룽따(바람의 말 그림이 그려진 깃발)를 달아두며 자신과 가족의 행운을 빈다. 말이 죽어도 그 영혼은 바람처럼 주인을 따라다니며 가축 떼의 번성과 쇠락을 좌우한다고 믿는 것이다. 또한 말의 갈기(mane)에 말(馬)의 영혼과 힘이 깃든다고 믿어, 수말의 갈기는 절대 자르지 않는다고 한다. 아무튼, 말은 그들에게 생존을 위한 동반자, 수호신, 그리고 종교 그 자체이다.  

《몽골비사(蒙古秘史)》에는 칭기스칸이 자신을 지켜준 산에 감사를 표하며 암말의 젖(마유)을 땅에 뿌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유(馬乳)는 정화, 기도, 축복의 의식에 쓰이는 신성한 음료였다. 칭기스칸의 장례식에서는 말 40마리가 함께 순장(殉葬)되었다. 저승까지 주인을 태우고 달리기 위해. 

말들과 델을 입은 마부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 복드 칸 산(Bogd Khan Uul)

만주시르 사원 주차장 입구에 서면 녹색 안내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몽골어로 큼직하게  "만주시르 계곡의 역사·종교·자연 유산(МАНЗУШИРЫН АМАН ДАХ ТҮҮХ, ШАШИН, БАЙГАЛИЙН ӨВ)"라고 쓰여있다. 안내판 옆에는 역시 몽골어로 자연사 박물관은 157m, 종교박물관(만주시르 사원)까지는 657m라는 또 다른 안내판이 있다. 화살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멀리 바위와 소나무 사이로 사원의 복원된 목조 건물이 아득히 보인다.

복드 칸 산(Bogd Khan Uul)
복드 칸 산(Bogd Khan Uul)

이 사원이 자리한 복드 칸 산(Bogd Khan Uul)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1778년 청나라 황실의 칙령으로 공식 보호구역이 된 이 산은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1872년)보다 약 100년 앞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호구역(국립공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96년에는 유네스코(UNESCO) '생물권보전지역(Biosphere Reserve)'으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역사·종교·생태가 한데 얽힌 살아있는 유산인 셈이다.

만주시르 사원 입구 안내판

자연사박물관 (Байгалийн Музей)

사원을 향해 걸어가다가 이 계곡에서 처음 만나는 건물, 자연사박물관(Байгалийн Музей)이 나온다.(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뜬금없는^^... 입장료가 있다. ) 외벽은 복드 칸 산(Bogd Khan Uul)의 자연석을 거칠게 쌓아 올린 석조 구조인데, 출입구에는 녹색 처마와 붉은 기둥의 몽골·티베트 불교 양식의 현관이 얹혀 있다.  내부 전시 내용은 (1)복드 칸 생물권보전지역의 동식물과 생태계, (2)이 지역에 서식하는 조류·포유류 박제 표본, (3)지역 지질과 자연환경 소개에 대한 것이다. 

자연사 박물관 내부의 전시물들

아름다운 대자연 앞의 설레임

사원 주변으로는 방목된 말과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고, 6월의 따뜻한 태양 아래 피어난 소박한 야생화들은 상처 입은 땅을 조용히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도 대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몽골인들은 그 안에서 말과 함께 호흡하며 다시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상처 입은 과거와 평화로운 현재가 묘하게 교차하던 만주시르 사원... 

만주시르 사원 주변 경관
만주시르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만주시르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의 멋진 경치
복원된 일부 만주시르 사원(Manzushir Monastery), 박물관으로 운영
만주시르 사원 입구
만주시르사원 본관 건물 (박물관으로 사용)

1733년, 지혜의 보살을 모시고 학문의 중심지로 우뚝 서다

약간의 경사지를 걸으면 만주시르 사원에 닿게 된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설레었다. 몽골의 사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라마교 사원은 처음이라... 늘 티베트를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몽골에서 티베트를 느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점점 사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대부분이 파괴되어 잔해만 남았지만 최근 복원한 본관 건물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바위산에 우뚝 서있는 기개와 위엄이 있었다.

 

만주시르(Manzushir) 사원은 1733년, 고승 루브산출템지그메드(Luvsanchültemjigmed)가 중국 청나라의 후원으로 세운 겔룩파(Gelugpa) 불교 사원이다. '만주시르(Manzushir)'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 Mañjuśrī(만주슈리)를 몽골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한자 문화권에서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의미한다. 오른손에는 번뇌의 어둠을 베는 불꽃 검을, 왼손에는 반야바라밀다경(般若波羅蜜多經)을 얹은 연꽃을 든 지혜의 보살이 바로 문수보살이다. (우리나라에는 오대산 월정사가 대표적인 문수보살을 모시는 사찰이다) 이 사원은 그 보살의 현신(現身)이 머무는 곳으로, '지혜'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학문 중심지로 설계되었다. 

 

18~19세기를 거치며 크게 번성했는데, 최전성기에는 20개가 넘는 전각과 300~350명의 라마교 승려가 상주하며, 불교 경전 연구와 의례, 점성술, 의학 지식의 전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비록 낡은 폐허로 남았지만, 한때는 연례 법회에 1,000명 이상의 승려들이 모여들던 신성한 배움터였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2층으로 된 건물 내부를 한 바퀴 돌면서 법당과 석가모니상, 탱화, 활불 초상화 등을 볼 수 있다.  

(왼쪽) 사원 내부 불단(佛壇), 석가모니불 (오른쪽) 입구 문에 새겨진 법륜(法輪, Dharmachakra)

복원된 법당 내부의 핵심 공간에는 진홍빛 벽 중앙에 금동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그 앞에 금빛 문양을 새긴 붉은 제단과 탁자가 놓여 있고, 특히 천장이 인상적이다. 짙은 녹색 격자 안에 금빛 용이 그려진 패널이 빼곡히 채워져 있고, 붉은 테두리가 전체를 두른 모습이다. 석가모니불  양옆에 늘어뜨린 금·녹색 현수막은 승리의 깃발(달마 배너)로, 불법(佛法)의 수호를 상징한다고 한다. 

 

입구 문에는 진리(법)의 수레바퀴라는 뜻의 법륜(法輪, Dharmachakra)이 새겨져 있다. (몽골 사원들의 지붕 위나 입구에서도 자주 보인다.)

법륜(Dharmachakra)이란?
법륜은 문자 그대로 '진리(법)의 수레바퀴'를 뜻한다. 고대 인도에서 수레바퀴는 진군하며 장애물을 부수는 전차의 바퀴나 태양을 상징했는데,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의 무지와 번뇌를 부수고 진리의 빛을 널리 퍼뜨린다는 의미로 수레바퀴 형태를 상징으로 삼았다.
법륜의 주요 상징과 의미
1. 8개의 바퀴살: 법륜 안쪽에 있는 8개의 바퀴살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8가지 올바른 수행 방법인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2. 둥근 원형: 시작과 끝이 없는 원의 형태는 부처님 가르침의 완전함을 뜻하며, 진리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굴러가며(전법륜) 중생을 구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중심축: 바퀴의 중심(허브)은 수행의 근본이 되는 도덕적인 계율과 마음의 안정을 상징한다.

만주시르 쿠투그트(활불)의 법좌(法座)

이 방은 활불(活佛)이 가르침을 펴던 의식 접견 공간이다. 용 문양이 조각된 두 개의 법좌가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 붉은 벽에는 황금빛 모자를 쓴 라마 승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노란 뾰족 법모는 겔룩파(Gelugpa) 고위 성직자의 상징으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만주시르 사원의 쿠투그트(활불) 중 한 분으로 추정된다.  

겔룩파(Gelugpa)란?
겔룩파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4대 주요 종파 중 하나로, 현재 티베트와 몽골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최대 종파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티베트의 위대한 종교 개혁가이자 학자인 쫑카파(Je Tsongkhapa) 대사가 창시했다.
당시 주술적이고 타락해 가던 기존 불교계의 폐단을 비판하며, 초심으로 돌아가 순수한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자는 개혁 운동에서 출발했다. 승려들이
의식을 치를 때 노란색 초승달 모양의 모자를 썼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황모파(黃帽派)'라고도 부른다.
(1) 엄격한 계율과 도덕성: 겔룩파는 승려들의 엄격한 독신 생활과 금주, 금욕 등 초창기 불교의 철저한 계율(빈야)을 목숨처럼 지킬 것을 강조한다.
(2) 체계적인 교리 학습과 논리: 신비주의나 주술보다는 철학, 논리학, 그리고 체계적인 경전 공부를 중시하였다. 승려들이 손뼉을 치며 격렬하게 불교 철학을 토론하는 모습(문답법)은 겔룩파 사원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풍경이라고 한다.
(3) 달라이 라마의 종파: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티베트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 '판첸 라마'가 바로 이 겔룩파 소속.

몽골과 겔룩파의 특별한 인연
16세기, 몽골의 강력한 지도자였던 '알탄 칸'겔룩파를 몽골의 국교로 받아들였다. 이때 알탄 칸이 겔룩파의 지도자였던 소남 갸초에게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넓은 지혜'라는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헌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겔룩파 불교는 몽골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몽골 유목민들의 거칠고 호전적인 기질을 온화하게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주시르 사원' 역시 18세기에 세워진 대표적인 겔룩파 사원이다. 

파괴 되기전의 만주시르 사원 모형 (사원 안에 게르가 인상적이다)

이 사원 모형은 1937년 공산 정권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 19세기 말~20세기 초 전성기의 만주시르 사원 배치 모형이다.

  • 주 법당 (Main Temple) : 모형 정중앙에 자리한 흰 외벽의 2층 건물이 주법당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
  • 의식 광장 (Ceremonial Ground) : 본당 앞쪽에 원형 문양이 새겨진 넓은 마당이 있다. 이곳은 참(Tsam) 의식 (라마승들이 가면을 쓰고 추는 종교 의례 무용)이 거행되던 공간으로, 연례 법회 때 수천 명이 모여들었던 장소이다.
  • 담장 안의 게르(Ger) : 흰 담장으로 사방을 두른 마당 안에 전통 게르(몽골 원형 천막)가 있다. 몽골 유목 문화와 사원 건축이 공존했음을 보여주며, 고위 라마의 임시 처소나 의식용 게르로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 대집회 전각 (Assembly Hall) : 초록 처마에 화려한 정면 장식을 갖춘 2층 규모의 큰 건물로, 승려 수백 명이 동시에 경전 독송과 법회를 진행하던 집회 공간으로 보인다.
  • 라마 거주지 (Aimag 구역) : 왼쪽 편에 회색 지붕의 작고 낮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데, 300~350명 라마승들이 거주하던 생활 구역(아이막)이다. 게르가 함께 배치된 것도 보인다.

폐허로 남은 사원 뒷편에서...

1937년, 모든 것이 무너졌다. 대학살의 시작!

그러나 1937년 몽골인민공화국의 공산정권은 소련 스탈린의 지시 하에 불교를 탄압하는 대숙청을 단행했다. 만주시르 사원 역시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남아있던 53명의 라마승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몽골의 스탈린'이라 불린 초이발산(Choibalsan)이 주도한 이 반(反) 종교 숙청으로 전국 797개의 사원이 18개월 만에 철거되거나 파괴되었다. 또한 공식적으로 약 18,000명에 달하는 승려가 처형되었다)

 

만주시르 사원의 20개 전각은 허물어졌고, 경전은 불타고, 불상은 녹여져 소련으로 반출되었으며, 수백 년의 지식 전승은 단절되었다. 지혜를 모시던 사원이 하루아침에 스러진 것이다. 불과 90년 전의 일이다. (1990년대 들어와서 복원 시작)

폐허가 된 사원의 잔해들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사원 옆모습
만주시르 사원 뒷편, 엄격한 수행을 하던 바위 절벽의 석굴들
바위 절벽의 석굴 중 하나에 그려진 라마교 승려들 모습

바위에 새긴 신앙, 그리고 대자연의 위로

사원 뒤쪽 경사면으로 이어지는 바위 길을 오르면, 거대한 바위 표면에 그려진 채색 벽화가 펼쳐진다. 그곳의 거대한 바위들에는 불상과 종교화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광풍이 건물을 무너뜨렸지만, 거대한 바위벽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던 몽골인들의 뼛속 깊은 신앙까지는 지워내지 못했나 보다.

바로 위 사진의 중앙에는 노란 법모(法帽)를 쓴 고승들이 결가부좌로 앉아 있고, 아래쪽에는 백의(白衣)를 입은 타라보살(부처님의 어머니)과 불꽃에 휩싸인 분노존(악을 물리치는 머서운 부처)이 대조를 이루며 그려져 있다. 바위를 피복처럼 두른 작은 돌담 사이로 파란 하닥(khadag, 기원 스카프)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아 지금도 참배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원 뒷편 곳곳에 부처 혹은 수행중인 승려들의 벽화를 볼 수 있다.

조금 더 오르면 커다란 바위의 채색 불화를 볼 수 있다. 청록빛 광배를 두른 황금빛 부처. 그 바로 옆에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어워(Ovoo) 탑이 서 있다. 하늘과 땅을 잇는 몽골의 전통 성소, 불교 도상과 무속 전통이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공존하는 광경은 몽골 불교의 독특한 혼합 신앙을 보여준다.

1937년 숙청당한 만주시르 사원 승려들 추모비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났던 추모비가 내려올 때는 더 강하게 마음을 잡았다. 1937년 숙청된 만주시르 사원 승려들에 대한 추모비라고 한다. 하얀 화강암 비석에 몽골 국가 문장이 새겨지고, 그 아래로 빽빽한 키릴 문자의 비문. 비석 둘레에는 파란 하닥(khadag, 기원 스카프)이 나부끼고, 누군가 쌓아 올린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이름도 기록도 없이 처형된 이들을 기억하는 방식치고는 너무 소박하지만, 그 소박함이 오히려 오래오래 마음에 걸렸다.

만주시르 사원의 대형 공양 솥(тогоо, 토고)

오르내리는 길 한켠에 만주시르 사원의 공양 솥(тогоо, 토고)이 서있다. 만주시르 사원에서 실제로 사용하던 주방 도구로, 1937년 사원이 파괴될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실물 유물 중 하나라고 한다. 너무 커서 부수지 못해 남겨진 게 아닐까... 300년을 버텨온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공양 솥은 지름이 1.5~2m 정도로 정말 크다. 전성기 때  만주시르 사원에는 300~350명의 라마승이 상주했고, 대법회 때는 1,000명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매일 아침 수백 명 분의 수테차(몽골식 밀크티)와 죽, 법회 때의 공양 음식을 이 솥으로 끓였을 것이다. 솥의 크기가 그 시절 사원의 규모를 말해주는 것 같다. 세월의 무상함...

이 계곡에서 만난 것들...

사원 근처 야생화들
야외 작품 전시장 (아이들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6~8세기 돌궐 시대 석상, 투브(Tuv) 지방 알탄불락 솜에 있던 웅깃(Ungut) 기념 단지에서 1982년에 현 위치로 옮겨온 석상

제주도 돌하르방을 닮은 이 석상은 사원으로 올라가는 길 초입에 있다. 6~8세기 돌궐 시대 유물이라고 안내판에 쓰여있다.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라고 한다. 여기엔 유목민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투르크·몽골 계통의 유목민들은 죽음을 끝으로 여기지 않았다. 전사는 이승에서 전투를 벌이듯, 저승에서도 여전히 전사여야 했다. 그래서 무덤 주위에 세운 것이 바로 이 돌사람들, 발발(balbal)이다.

 

발발은 죽은 전사가 살아생전 손수 쓰러뜨린 적들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하나의 돌상은 한 명의 패배한 적을 의미 한다. 전사의 무덤 주변에 발발이 많을수록 그는 더 강한 용사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전통은 대략 5세기에서 10세기 사이,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 지대를 누비던 돌궐(突厥, 투르크 카간국) 시기에 가장 번성했다. 그들은 오늘날의 몽골 초원에서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평원에 이르는 드넓은 땅에 고분을 쌓고, 그 주위에 수십, 때로는 수백 개의 발발을 도열시켰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문화는 점차 사라졌다)

 

즉, 투박하게 새긴 이 석상의 얼굴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고, 한 사람의 용맹함을 기리는 기록이고, 영혼이 저승에서도 홀로가 아님을 알리는 증거이며, 풀과 바람만 있는 초원에서 수천 년을 버텨온 기억의 파편인 것이다. 

 

돌궐시대의 유물들
쓰레기 분리수거장이 인상적이었다.

 

사원 주변으로는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6월의 따뜻한 태양과 계곡 여기저기 피어난 야생화들은 '상처 입은 이 땅'을 조용히 위로하고 있는 듯했다. 사원의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도 자연은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몽골인들은 말과 함께 호흡하며 다시 웃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상처 입은 과거와 평화로운 현재가 묘하게 교차하던 만주시르 사원. 몽골 여행의 첫 페이지를 펼치기에 이보다 더 묵직한 울림을 주는 곳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