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인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한옥마을로 산책 겸 나들이(?)를 나갔다.

성지옆 개천을 따라 난 '바람 쐬는 길'을 따라 걸으니 자연스레 관광객들이 몰리는 경기전 쪽이 아닌 향교 앞 길로 들어섰다.
해가 막 기울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지붕 너머로 번지는 붉은빛이 아련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 단아한 길에 우리만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에 이런 고요한 한옥 마을을 만날지는 생각도 못했다.

걸음을 옮길 수록 너무나 매력적인 향교길!!! 번화한 쪽 골목에서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한옥마을의 매력에 가슴이 설레었다. 봄에 피는 다양한 색의 꽃들의 밤 나들이, 오래된 나무 대문의 결, 아련하게 흘러나오는 불빛들과 주인 없는 간판들...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조용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 그 침묵이 스스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향교 앞 홍살문, 그리고 그 안의 향교지붕... 추억의 걸오(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은행나무^^.
붉은 기둥이 저녁빛을 받아 더욱 짙어지고, 그 너머로 몇 그루의 나무들이 어둠 속 장군들처럼 바람도 없이 서 있었다.
瞻彼闋者, 虛室生白。 텅 빈 곳을 바라보라, 빈 방에서 빛이 생겨난다. — 장자, 『장자』 「인간세」
채워진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워진 곳에서 비로소 빛을 낸다. 수백 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힘을 느끼며, 허둥대지 않고 증명하려 들지 않는 모습을 닮아야 겠다는 생각도 다시금 했다. 걸어가면서 만난 한옥들은 너무나도 단아했고 어둡지만 빛이 났다.
관광지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시간대가 있다. 해가 넘어가기 직전, 빛이 가장 길어지면서 동시에 가장 부드러워지는 그 짧은 틈.
전주 한옥마을은 그 시간에 향교 앞 골목에서 비로소 제 얼굴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표정이 아니라, 오래도록 거기 있으면서 자리를 지킨 깊이와 무게감.
노자는 비어 있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수레바퀴의 빈 축, 그릇의 빈 속, 방의 빈 공간이 진짜라고.
사람이 빠져나간 골목도 그랬다. 가득 찬 곳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그 빈 거리가 고스란히 건네주었다.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아까웠다. 한 번 더 돌아봤다. 그 길의 모든 것이 봐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색도 없이 그대로였다.
나도 그렇게 고요하게 보여짐을 의식하지 않고 서 있고 싶다.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어 동요하지 않음이 마음의 근본이다. — 이황, 『퇴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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